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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 광화문광장 나라, 청계광장 나라

이규연
논설위원
2014년 9월 3일 저녁 6시.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앞. 세월호 유족 농성장에는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진상규명과 세월호특별법 처리를 촉구하는 집회가, 다른 쪽에서는 유족을 지지하는 동조단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구호와 탄식이 난무하는 광화문광장에 슬그머니 들어왔다. 한 손에는 흰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사내는 농성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봉투 안에서 작은 종이박스를 꺼내 들었다. 상자에는 OOO치킨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치킨조각을 입에 물어보기도 전에 주섬주섬 짐을 정리해 자리를 떴다. 농성장에서 여러 명이 날리는 차가운 눈총을 알아챈 것이다. 경광봉을 들고 주변을 순찰하던 의경이 요즘 분위기를 전했다.



 “한 열흘 전부터 광화문광장은 요지경이다. 갑자기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출현한다. 자리를 깔아놓고 맛있게 치킨 한 마리를 다 먹고 자리를 뜬다. 치킨 조각을 들고 셀카를 찍는 사람도 있다. 며칠 전에는 어르신들이 치킨상자를 쌓아놓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광화문광장에서 철수한 ‘치킨 사내’는 네거리를 건너 청계광장 쪽으로 향했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농성을 벌이는 곳이었다. 광화문광장 농성장과 직선으로 100m 떨어진 장소다. 사내는 동료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청계광장 농성장에는 세 가지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월호특별법 반대, 국회선진화법 반대, 국회 조기해산.’



  저녁 7시. 점잖게 생긴 보수단체 회원을 청계광장에서 만났다. ‘김진요(김영오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팻말을 목에 건 그는 유족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수사권·기소권까지 요구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 김영오씨(세월호 유족)가 40일 넘게 단식을 했다는데 말이 되나.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특히 세월호 유족들이 우리 대통령을 욕보이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그러니 정의감에 불타는 일부 회원들이 (광화문광장으로) 넘어가 응징을 하는 것이다.”



 유족이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로 가겠다며 삼보일배에 나선 날, 어버이연합은 청계광장에서 규탄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광화문광장을 향해 “추석도 다가오는데 송편이나 빚어라” “우리는 먹으면서 싸운다”고 목청을 높였다. 한 보수 학생단체는 김영오씨의 단식농성에 맞서 ‘폭식투쟁’을 예고했다가 김씨가 단식을 중단하면서 취소하기도 했다.



 가수 김장훈씨가 광화문광장에서 두 차례 단식농성을 벌이면서 ‘블랙 코미디’는 더 블랙화한다. 박근혜 대통령 동생(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씨가 ‘김영오 허구’를 입증하기 위한 실험단식에 돌입한다. 청계천(나중에 장소 옮김)에 진을 치고 물·소금만 먹고 얼마나 버티는지 ‘생체’실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신씨는 김장훈에게도 함께 실험단식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밤 10시. 청계천 주변의 노천카페에서 한 무리의 직장인을 만났다. 광화문에 직장이 있는 40대 여성은 한 달 사이의 변화를 이렇게 전했다. “재·보선이 끝난 직후 현장 분위기가 급속도로 거칠어졌다. 단식을 패러디한 ‘치킨단식’ ‘황제단식’ 같은 표현이 등장했다. 유족 요구에 무리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식을 잃은 부모들인데.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조롱을 참지 못하는 사회가 돼 버렸다.”



 밤 11시30분. 청계광장 나라의 불빛은 사라졌고 광화문광장 나라에서는 희미한 불빛 아래 단식농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근 청계천 변은 늦은 시간에도 초가을의 정취를 느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이들에게 광화문광장의 탄식은 들리지 않았다. 한가위 보름달이 여무는 밤에 이순신장군만이 ‘두 나라’ 사이를 흐르는, 검고 푸른 울돌목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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