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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3) 토종 '장미라사'는 어떻게 갤러리아 명품관 최장수 브랜드가 됐나

① 1992년 아내(오숙자)·딸(지은)과 함께. ② 2000년 장미라사 첫 해외 진출지였던 네팔 카트만두에서. ③ 2009년 이탈리아 크레모나. 편집매장 시장조사차 갔다. 현지 편집매장 관계자들이 당시 입은 반코트를 극찬했다고. ④ 2011년 장미라사의 재단 실장들과 함께.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영원 대표 ⑤ 2012년 파리 마들렌 성당 앞. 이 대표는 왼쪽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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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하는 수입 럭셔리 브랜드로 채워진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이스트엔 한국 남성복 브랜드가 딱 하나 있다. 맞춤 양복점 장미라사다. 1998년 입점했으니 벌써 17년차로, 갤러리아에서 국내·남녀 브랜드를 통틀어 가장 오래됐다. 어지간한 명품도 몇년 버티기 힘들다는 백화점에서 이렇게 장수한 저력은 뭘까. 이영원(57) 장미라사 대표의 삶에 답이 녹아있었다. 한국 양복의 지나온 역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는 양복장이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고졸사원 “나는 옷하고 아무 상관없던 사람이예요. 그저 서울에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20살 때던 1977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왔다. 당시엔 서울에 살려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회사에 취직하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솔직히 공부는 잘 못했다. 지방대 겨우 갈 성적이었다. “돈이나 벌자” 싶어 삼성물산에 지원했고, 공채로 입사했다.

처음 발령 받은 곳이 장미라사였다. 고졸 신입직원인 그에게 떨어진 일은 봉제사업부의 단순 업무 보조였다. 똑같이 고졸로 서울에 온 친구들은 은행에 들어가 번듯한 은행원이 되기도하고, 대학에 진학해 행정고시에 붙기도 했다.

“고민이 많았죠. 하지만 나는 일하자,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죠.”

장미라사 본점에 있는 낡은 미싱. 과거엔 이 미싱으로 작업했다.
무지막지한 학벌사회라지만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나 고위 공무원 중에도 고졸 출신이 적지 않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내 보면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얘기일 뿐 나중에 대학 졸업장을 따거나, 최소한 무슨 명문대학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증이라도 하나쯤 다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말 그대로 고졸이다.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대학에 못 갔어요. 학교 갈 시간이 없어요. 공부는 늘 합니다. 옷 핑계로 60개국 이상 다녔어요. 사하라 사막, 히말라야 산, 바그다드…. 볼수록 세상엔 배울 게 너무 많아요. 요즘 유럽에 가면 오래된 도시나 박물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요. 이탈리아 꼬모에 가면 아예 자리잡고서 부자들이 어떻게 입나 보고, 스위스 루가노에선 돈 많은 노인들 봐요.”

이병철 “이병철 회장만한 멋쟁이는 다시는 없죠.”

1987년 삼성종합기술원을 방문한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
이 대표는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1910~87)을 “더 없이 멋있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탐미주의자에요. 그 연세에 남들 안 입는 핑크빛 재킷도 즐겨 입었거든요.”

이런 사실을 아는 이유는 그가 장미라사에 근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이 회장이 작고할 때까지 10년 가까이 옷 심부름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맞춘 옷을 사무실로 배달하거나 관리하는 일이었다.

“옷 잘 입는 사람이라고 해도 보통은 그냥 장소에 맞춰 입는 정도잖아요. 그런데 이 회장님은 달랐어요. 그날 머릿 속에 든 생각에 맞춰 옷을 입는 거에요. 가령 반도체를 추진할 때는 머리도 메탈 그레이(짙은 회색)로 염색하고 재킷도 비둘기색보다 더 짙은 회색을 골라 입어요. 바지는 밝은 블루로 하고. 한번은 28층 회장실에 올라가니 홍진기 회장(1917~86)이랑 무슨 전자 얘기를 한참 하는데, 그 복장이더라고요. 또 예술품에 관심있는 시기는 그에 맞게 입고. 어린 나이에 그걸 보면서 ‘무슨 그림 그리듯 옷을 입는구나’ 싶었어요.”

88올림픽 그는 88년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기라고 늘 말한다. 서울올림픽이 열리지 않았다면 장미라사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글로벌화의 시작, 다른 하나는 대기업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올림픽 전에는 한국사회 전체가 정말 모든 면에서 우물 안 개구리였죠. 옷도 마찬가지구요. 옷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옷을 만들어왔구나, 라는 걸 자각하게 된 계기가 올림픽이에요. 이탈리아·영국 등 세계적인 옷을 비로소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전에는 일본만 쳐다봤거든요. 일본 옷하고 비슷하게 만드니까 그저 우리가 잘만드는 줄로만 알았죠. 그러다가 좋은 옷이 뭔지, 아니 무슨 옷을 만들어야 하는 지를 처음 생각하게 된거죠.”

당장 체질 개선에 들어갔다. “사실 장미라사가 너무 잘 될 때예요. 바꾸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온거죠. 잘될 때 안 바꾸면 늦습니다. 마케팅의 기본 아닌가요.”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기업 역시 세계로 눈을 돌리는 계기였다. 장미라사가 88년 제일모직으로부터 독립한 것도 이런 영향이 컸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각 회사별로 월드베스트로 내놓을 수 있는 게 뭔지 찾았던 것 같아요. 제일모직에서는 당시 장미라사가 일종의 대표상품이었지만 세계에 내놓을 수있는 품목, 더욱이 대기업이 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당시 본부장이던 김선하 전 회장이 장미라사 지분을 넘겨받아 나오면서 당시 총괄담당이던 이 대표를 매니저로 함께 데리고 왔다.

“사실 전 삼성 소속으로 있는 게 더 낫죠. 그래서 김 전 회장한테 장미라사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겨주면 따라가겠다고 했더니 선뜻 그러마, 하는 거예요. 몇 년 뒤 아예 지분을 넘긴다는 약속과 함께요.”

그리고 10년 후인 98년. 김 전 회장은 약속대로 지분을 넘겼다.

아테네 올림픽 후 이 대표 머리는 온통 좋은 옷에 대한 고민 뿐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해외출장이 시작됐다.

“올림픽 전에는 출장이라도 해외 나가기 어려웠죠. 무슨 서양교육 그런 것도 받았을 걸요. (※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사실 그때도 기회가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사실상 장미라사 운영을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가야할 출장도 윗사람이 가는 거에요. 싸워보기도 했는데, 뭐 소용 없었죠.”

그러다 장미라사가 제일모직으로부터 독립한 후인 90년 로마에 처음 갔다. 이때도 회삿돈이 아니라 사재였다. 빚 내서 1000만원 들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둘러보고 왔다. 당시 일반 직원 월급이 100만원도 안될 때였다.

“충격을 받았어요. 컬처 쇼크라고 해야하나.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 나는 지금껏 뭐했나 싶고, 빨리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다시 나갔죠.”

그는 지금도 1년에 넉 달은 해외에서 보낸다.

처음엔 사재 털어 단신으로 나갔지만 이젠 직원도 자주 데려간다. 특히 재단사와는 아테네를 즐겨 갔다. 많이 갈 땐 한해 네 번 간 적도 있다. 라인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가봐야 아무 것도 없어요. 쓰러진 돌기둥밖에는. 하지만 많이 보면 나중엔 좀 보여요. 정말 아는 만큼 보여요. 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실루엣. 나중에 듣고 보니 옷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도 다들 많이 갔더라고요.”

시장조사 방식도 여느 회사와는 다르게 한다. 여직원들 데리고 출장을 가면 각자 2000~3000달러씩 주고는 돈 하나도 남기지 말고 자기가 쓸 걸 사라고 한다. 보는 것과 내 것 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직접 느껴야죠. 딱 자기 수준만큼 삽니다.”

갤러리아 명품관 이 대표는 대략 10년마다 굵직한 전환점을 맞았다. 한국이 외환위기로 고통받던 98년에도 역시 그의 인생엔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다. 아니, 저질렀다고 해야 하나. 맞춤 양복집 최초로 백화점, 그것도 압구정동 갤러리아 명품관에 입점한 거다. 지분을 인수해 장미라사 대표에 취임한 해다.

갤러리아백화점 안의 장미라사 매장 전경.
“차별화해야 하니까요.”

왜 갤러리아였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당시 해외 럭셔리 브랜드로만 구성한 명품관은 갤러리아 한 곳뿐이었다. 국내 럭셔리 시장이 막 뜨기 시작할 때다.

“입점했다는 사실만으로 명품으로 인정받는 거잖아요. 국내 브랜드는 우리 하나뿐이었어요. 당시 갤러리아 최상순 사장하고 담판을 지었죠. 우리도 명품인데 왜 안받느냐고 억지 부려서 들어갔죠.”

대단한 해외 럭셔리 브랜드 사이에서 기가 죽을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자극을 받아 좋다”고 했다. “색감이나 실루엣은 확실히 월등히 뛰어나요. 배워야죠. 갈수록 내가 참 모른다는 걸 깨닫게 돼요.”

장미라사는 40만~100만원대 중가 제품은 없앴다. 기성복과 비슷한 가격과 품질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200만~400만원대에 집중했다. 일부러 가격만 올린 게 아니라 품질 좋은 원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갤러리아 입점 첫해 전체 남성복 가운데 매출 3위를 기록했다. 갤러리아 측은 “지금도 장미라사는 입점 브랜드 중 중간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고 설명했다. 갤러리아, 그리고 태평로 본점, 지난해 오픈한 부산 센텀시티에서 그가 1년에 파는 양복은 2000여 벌이나 된다.

“캐시미어 재킷은 세계에서 내가 가장 많이 팔아요. 원단 파는 사람은 아니까 이건 이탈리아에서도 인정해요.”

카트만두 한국을 지키려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 남들 눈엔 무모한 도전을 그가 계속 하는 이유다.

“차라리 한복은 외국에 팔 수 있을지 몰라도 양복 파는 건 어렵잖아요. 제일모직이 전에 세계적인 원단을 만들겠다면서 양복 한 벌에 만불짜리 원단을 파리에 팔러 간 적이 있어요. 거기 업체 사람이 ‘한국 가서 케냐 진생(인삼) 좋다면서 사라고 하면 누가 사겠느냐’고 하더라고요. 못 팔았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걸 깨지 않고는 아무 것도 못해요. 내수만 하면 된다는 건 착각이에요. 외국에서 못 파는데 한국을 어떻게 지켜요. (외국 브랜드가) 계속 밀고 들어오는데. 지키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해외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도, 또 첫 해외 진출지로 네팔 카트만두를 택한 것도 이런 철학이 깔려 있다. 히말라야 여행을 갔다 네팔 왕족이 영국제 양복을 입는 것을 보고 “여기구나” 했단다. 여러 시도 끝에 결국 왕에게 양복을 입혔다. 그런데 쿠데타로 왕이 죽고, 혁명으로 쫓겨나는 등 정세가 너무 불안정한 데다 공화정이 들어선 후로 더 이상 가지 않는다.

그 다음 도전한 게 중동이다. 그곳 상류층에게 양복을 팔기 위해서다. “날씨가 더워서 양복 안 입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영국 테일러들한테 옷 해입던 사람들이예요. 옷 입는 수준이 상상을 뛰어넘어요. 그런데 지금 전쟁 중이라 영국애들이 안가잖아요. 그래서 제가 갔죠.”

버릴 수 없는 이름 장미라사 장미라사. 지금 시대에 참 촌스런 이름이다. 사실 처음엔 잠깐 부르고 말 운명이었다. 56년 제일모직 원단을 테스트하기 위한 부서로 처음 생겨났기에 딱히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당시 양복엔 모두들 ‘라사’(유럽을 의미하는 구라파의 羅에 원단을 뜻하는 絲)를 붙였고, 거기에 당시 삼성의 상징인 장미를 붙여 장미라사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그게 브랜드로 굳어졌다.

그는 이름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했다. “오래된 게 클래식이 되기도 하려니와, 또 더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모던하게 바꾼다해도 어디 유럽 브랜드하고 상대가 되나요. 게다가 인생을 같이 한 이름인데 바꿀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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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경희·심영주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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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