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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통일로 ‘대박’ 일군 신라, 평화 만끽하며 권력다툼 몰두

문무왕의 수중릉. 신라 중대의 왕들은 양백성(養百姓·백성을 보살핌)과 무사이(撫四夷·외적을 진압함)를 국가 목표로 삼한통합을 완성했다. [사진 권태균]




<19> 신라 멸망의 서곡

신라의 역사는 상·중·하대(代)로 구분된다. 시조 혁거세~제28대 진덕여왕이 상대, 제29대 무열왕~제36대 혜공왕이 중대, 제37대 선덕왕~제56대 경순왕을 하대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12, 경순왕 9년(935) 조)



중대에는 김춘추의 종족(宗族)들이, 하대에는 원성왕의 종족들이 나라를 지배했다. 중대와 하대의 왕들은 색깔이 달랐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이 신라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했다.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은 중대의 중흥을 일궈냈다. 이 시기엔 왕위 장자계승의 원칙이 지켜졌다. 왕자가 없을 때는 왕의 동생이 계승하기도 했다. 왕위는 매우 안정됐고, 왕들은 강력한 왕권으로 왕국 전체를 비교적 잘 통치했다. 중대의 왕들은 신라를 대평화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한통합은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결국 대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합에 성공한 이후 김유신의 말대로 외우(外憂)가 없어졌기에 통일신라는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제33대 성덕왕은 733년 8월 보름에 월성의 한 언덕에서 시종들과 경치를 보며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김유신의 적손(嫡孫) 윤중을 불러오게 했다. 왕은 자신과 모든 신료들이 안평무사(安平無事)한 것은 모두 윤중의 조부 김유신의 덕택이며 이를 잊는다면 도리가 아니라 했다. 윤중을 가까운 자리에 앉히고 왕은 김유신의 무용담을 열거하며 극찬했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돌아갈 때에는 절영산의 말 한 필을 선물로 줬다.(『삼국사기』 『열전』 3, 김유신 하)



신라 하대(下代)를 연 제38대 원성왕의 능인 괘릉(사적 제26호). 원성왕의 후손들은 왕위계승 전쟁을 벌여 신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유교로 무장한 신료 양성, 중국 배우기

이 무렵 성덕왕을 포함한 신라인들은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삼한통합으로 늘어난 옛 백제·고구려의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게 된 신라의 왕들은 통치체제를 확대 개편하였다. 문무왕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조에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고치라고 했다. 삼한통합으로 신라의 재정수입도 크게 증가했다. 그 결과 신문왕 7년(687) 5월에는 문무관료전을 차등 있게 지급했다. 2년 후에는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에게 매년 조(租·곡식)를 차등 있게 나눠주었다.



중대 신라는 중국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교리로 무장한 신료를 양성했다. 유교적 윤리와 같은 당시에 만들어진 중국화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한통합으로 신라가 평화를 이룰 수 있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중대에는 무열왕·문무왕·신문왕과 같은 뛰어난 군주가 있었다. 신라 중대를 연 무열왕은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중 한 명이다. 둘째, 왕과 국가를 위해 열정을 다한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 같은 신료집단이 있었다. 셋째,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는 새로이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통해 인적자원과 재정확대를 기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 넷째, 외국과의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이종욱, 『신라의 역사 2』, 2002)



혜공왕과 왕비, 반란군에게 피살

하지만 중대의 대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혜공왕(765~780)에 이르러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을 대신해 태후는 섭정을 했다. 혜공왕은 장년이 되어서는 노래와 여색에 빠졌다. 나라의 기강은 문란해지고 재난도 겹쳤다. 민심이 떠나자 나라는 편치 않게 되었다. 780년 2월에는 김지정이 무리를 모아 궁궐을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달 뒤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혜공왕과 왕비는 반란군에 살해됐다.(『삼국사기』 9, 혜공왕 16년)



김양상은 제37대 선덕왕이 됐다. 신라 하대(下代)가 열린 것이다. 김양상이 왕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왕정을 장악할 생각은 없었다.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의 조카뻘 되는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의 집은 왕경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물이 불어 건너지 못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김경신을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곧 제38대 원성왕(785~798)이다. (『삼국사기』, 10, 원성왕 즉위조)



이후 제52대 효공왕까지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 시기에 왕정이 붕괴되어 갔다. 신라도 멸망의 길을 치닫게 됐다.



인사정책은 난맥상을 보였다. 이 때문에 중대의 칠성우와 같은 인재들이 더 이상 등장할 수 없게 됐다. 제41대 헌덕왕 14년(822) 상대등 충공은 정사당에서 관리를 뽑은 뒤 병가를 얻어 집에 머물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때 집사부의 시랑(侍郞) 녹진이 찾아가 어렵게 충공을 만났다. 녹진은 “그동안엔 재주가 큰 사람은 높은 벼슬자리에 앉히고 작은 사람은 낮은 직책을 맡겨, 벼슬자리에는 적임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정치가 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풍토가 달라졌다고 개탄했다. 어떤 사람이 가까운 사이면 그가 설령 인재가 아니더라도 높은 자리로 끌어 올려주고, 미워하는 사이면 재능이 있더라도 구렁창으로 빠뜨리니 나라 일이 혼탁하게 될 뿐 아니라 인사문제를 처리하는 사람도 병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충공은 녹진의 직언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이를 태자에게도 알리라 했다.



822년 ‘김헌창의 난’ 뒤 종말 향해 질주

같은 해인 822년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신라의 종말을 재촉했다. 아들을 낳지 못한 헌덕왕은 이해 정월 아우 수종을 부군(副君·왕위계승권자)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게 했다. 2월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 그리고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해 복속시켰다. 김헌창은 9개 주 중 5개 주, 5개 소경 중 3개 소경을 장악했다.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의 보고를 들은 조정에서는 8명의 장군을 뽑아 왕도의 8방을 지키게 한 후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 잡찬 위공, 파진찬 제릉, 이찬 균정, 잡찬 웅원, 대아찬 우징, 각간 충공, 잡찬 윤응 등이 동원되었다.



조정에서 보낸 군대는 도동현·삼년산성·속리산·성산 등에서 승리를 거두고 웅진에서 김헌창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 김헌창은 성에 들어가 열흘을 버텼는데 성이 함락되기 전 자결했다.(『삼국사기』 10,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8명의 장군 중 여럿은 왕위계승전을 벌였다. 이들은 모두 원성왕의 후손들이었다. 제릉(제43대 희강왕), 균정(제45대 신무왕의 아버지), 우징(제45대 신무왕), 충공(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 등이 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헌창의 난은 신라 멸망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원성왕 후손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이들에게는 왕위계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태자(太子) 제도는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군사적 힘이 중요했을 뿐이다. 헌덕왕은 조카인 제40대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을 쫓아내고 왕좌에 오른 조선의 수양대군(세조)과 다를 바 없다. 희강왕·민애왕·신무왕은 836년 12월부터 839년 1월까지 짧은 기간에 왕위계승전을 벌였다. 희강왕은 큰아버지 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민애왕은 6촌인 희강왕을 목매 죽게 하고 왕위를 빼앗았다. 우징(신무왕)은 장보고의 군대 5000명을 동원한 왕위계승전에서 민애왕을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했다. 중대에 삼한통합을 했던 신라의 군사력은 이제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렸다. 또한 왕권도 땅바닥에 떨어졌다.



원성왕계 종족들의 왕위계승전은 그 후 100년도 못 가 신라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오직 왕위를 장악하기 위한 권력다툼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백성도, 국가도, 그 뒤에 이어질 역사도 안중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어떤가. 신라 하대의 왕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들과 같이 정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객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교수·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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