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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임진왜란으로 전세계 노예무역 확대 … 근거는?

그림1 화가 미상, 『세로 리코의 성모』, 1720년 이전. 포토시 은광이 있는 삼각형 붉은산의 윗부분에 성모 마리아가 위치하고 있다.
이 그림의 소재는 오늘날의 볼리비아에 위치한 세로 리코(Cerro Rico)라는 곳이다. 세로 리코는 ‘부유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 산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포토시(Potosi)라는 엄청난 규모의 은광이 이 산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⑫ 대항해시대 아메리카 은(銀)의 세계 일주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지는 새 항로를 개척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과 은을 확보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초기에 이들은 인디오 원주민들이 보유한 금은공예품을 탈취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원주민으로부터 빼앗을 귀금속이 더 이상 없다고 판단되자 정복자들의 관심은 금은 광맥을 직접 찾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마침내 1545년 그들은 포토시에서 초대형 은광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인디오 원주민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여 전통적인 용해방식으로 은을 채굴·제련하였다.

그림2 화가 미상, 『포토시의 세로 리코』, 1584년.
그런데 은의 함유량이 높은 광맥이 점차 고갈되자 은광의 경제성이 위협받게 되었다. 그런데 1570년쯤 스페인에서 수은을 이용하여 저급 광맥에서도 값싸게 은을 추출하는 기술인 수은아말감법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페루에서 대규모 수은광산이 개발되면서 포토시의 은 생산은 다시 증가하게 되었다. 그림 2는 1584년에 제작된 포토시 광산의 그림이다. 은광 아래쪽으로 광산촌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아래로 노동자들이 제련작업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은 생산이 절정에 이르렀던 1600년쯤에 이 도시의 인구는 1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해발 4000m에 육박하는 장소에 서반구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도시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포토시광산의 채굴 장면은 드 브리(Theodorus de Bry)가 남긴 작품에 가장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드 브리는 16세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동판화가이자 출판가였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탐험가들이 남긴 기록에 의거하여 제작하였다.

그림3 드 브리, 『포토시』, 1590년.
따라서 탐험의 모습과 신세계의 풍습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1590년에 제작한 포토시광산의 모습은 매우 독특하다(그림 3). 세로 리코의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묘사한 점이 눈길을 끈다. 산꼭대기의 구멍을 통해 인디오 원주민들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채굴작업을 진행한다. 이들은 벌거벗은 채 횃불을 밝히고 힘들게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채굴한 은덩이를 부대에 담아 어깨에 짊어지고 사다리를 통해 광산 밖으로 나온다. 이 은덩이는 다시 그림의 왼편과 오른편 위쪽에 보이는 것처럼 라마와 같은 가축을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수송된다.

그림에서 느낄 수 있듯이, 원주민 광부들의 노동조건은 지극히 열악했다. 고된 노역이 장시간 이어졌고 사고의 위험도 컸다. 또 이들은 대부분 낮은 지대에서 살다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로서 낯선 기후와 음식, 가혹한 채찍질로 인해 죽거나 노동 능력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에 세로 리코는 ‘사람을 잡아먹는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산’이 엄청난 인명 희생을 가차없이 요구하는 상황, 그리고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사들여 오게 되는 상황이 바로 대항해시대가 드러내기 꺼리는 속살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아메리카의 은은 어디로 갔을까? 스페인인들은 채굴한 은의 대부분을 자국으로 보냈다. 이 은은 스페인이 왕위계승전쟁을 치르고, 종교개혁의 와중에 신교도를 압박하고, 서유럽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수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은이 서유럽 전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는 다시 서유럽이 발트 해 연안에서 곡물과 목재를 수입하고, 레반트에서 동방의 생산품을 구매하고, 무엇보다도 남아프리카를 도는 인도항로를 통해 인도와 중국의 인기상품을 수입하는 데에 사용됐다. 한편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의 일부는 태평양을 횡단하는 세계 최장항로를 통해 마닐라에 있는 상관에 보내져 아시아 물품을 구입하는 데에 소요되었다. 이렇듯 세계무역망을 통해 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은 지구를 돌고 돌아 중국과 인도로 모아졌다. 당시 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은을 가장 많이 생산한 국가는 일본이었는데, 일본의 은도 수출항 나가사키, 그리고 쓰시마와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를 거쳐 중국으로 향했다.

은이 풍부해진 중국은 조세를 은화로 납부하도록 제도를 개편하였다. 명대 후기와 청대에 실시된 일조편법(一條鞭法)과 지정은제(地丁銀制)가 바로 이런 제도였다. 새 조세제도는 은에 대한 수요를 늘려 세계적으로 은을 중국으로 더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마치 전 세계를 연결한 순환펌프가 작동하듯이 은이 지구를 일주하여 중국으로 빨려들었다. 대항해시대에 세계는 은을 매개로 하여 단일한 경제권으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정세도 세계적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되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오자 명은 군대를 파병하는데, 이에 따라 막대한 양의 은의 필요해졌다. 임진왜란 시기와 전쟁 후에도 명은 부족한 은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에 은을 요구했다. 세계적으로는 명이 은의 순환펌프에 압력을 높였을 것이고 그에 따라 아메리카에서는 은 채굴의 필요성이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광산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노예수입을 더 늘렸을 것이다. 은을 매개로 지구 전체가 연결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세계적 노예무역의 증가로 이어졌으리라는 추정은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이렇게 대항해시대에 은은 식민지 체제와 국제 무역망을 통해 세계를 일주하였다. 당시에 은의 종착지가 중국과 인도였다는 사실은 아시아의 경제가 국제적 경쟁력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 네트워크의 형성이 대항해시대를 연 유럽인들에 의해 주도됐다는 사실은 향후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점차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가리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그림의 아래 왼편에는 교황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오른편에는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있다. 이들 위로 보이는 황금색 복장의 작은 인물은 잉카제국의 황제로, 유럽인이 옮겨온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이다. 왜소하게 표현된 카팍 뒤로 붉은 산이 성모를 덮고 있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안데스 산맥의 토지의 여신인 파차마마(Pachamama)를 성모상과 결합시킨 것이라고 해석한다. 산의 양옆으로 떠 있는 해와 달도 잉카제국에서 사용되던 형상이다. 유럽의 기독교와 잉카의 전통신앙을 혼합한 형태의 작품이다.

이른바 ‘신크레티즘(Syncretism: 혼합주의)’의 색채가 다분한 이런 작품들은 18세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이들은 공통으로 신세계 믿음 체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것이 구세계 믿음 체계에 흡수되고 복속된 것으로 묘사한다. 유럽의 아메리카 진출은 물리적 정복만이 아니라 정신적 정복이기도 했다는 점을 『세로 리코의 성모』는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채굴된 은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이야말로 4세기 전 대항해시대가 초래한 세계 경제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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