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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세종의 부름 거부한 태재, 차향과 벗하며 문향 키워

산림에서 사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삶을 그린 8폭 병풍 산정일장(山靜日長) 중 제5폭 부분도. 이인문(1745~1824) 개인 소장.
조선의 건국은 정치·사회·문화·의례 등에 많은 변혁을 가져왔다. 실권을 장악한 신진 사대부들은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법전을 만들어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12> 태재 유방선

아울러 불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원을 철폐하고, 사전(寺田)을 몰수하는 한편 승려의 출가를 법으로 제한했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불교의 쇠락뿐만 아니라 음다 풍속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구나 태종 때 이르러서는 왕실의 의례에서 차를 퇴출한 것이 본격화됐다. 태종15년(1415) 다시(茶時·관청에서 공무를 보기 전 차를 마시는 의례)를 폐지하고, 이듬해(1416)에 선왕후(先王候)의 기신재제(忌晨齋祭)에 차를 대신해 술과 감주를 올리라는 조칙을 내렸으니 이는 통치자의 차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원래 차 문화를 주도한 것은 왕실 귀족층과 승려들이었고, 차 문화가 풍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문인들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불교의 몰락이나 왕실 의례에서 차가 사라진 것은 조선의 차 문화사에 있어서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차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음다(飮茶) 풍속의 위축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차를 즐기는 습속(習俗)이 일시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원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명전(茗戰) 놀이가 줄어들었지만 검소하게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음다의 본질은 조선시대에서도 이렇게 이어졌다.

목은 이색의 외손자로 뛰어난 문장가
태재 유방선(太齋 柳方善1388~1443)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차를 즐겼던 인물이다. 차를 통해 소외된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차를 즐기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가 남긴 수 편의 다시(茶詩)에는 순수한 차의 맑음을 오롯이 즐기는 은자(隱者)의 자족한 삶이 잘 드러나 있다. 더구나 그의 문체는 조선의 시단(詩壇)을 이끌던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김수온(金守溫)·성간(成侃) 같은 제자를 기른 대가다운 풍미를 지녔다. 시어와 시어 사이에 숨겨진 간극의 절대 미가 주는 감동의 여운이 길었다.

고려의 명신이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사암 유숙(思庵 柳淑·1324∼1368)이 그의 증조부(曾祖父)이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이 외증조부(外曾祖父)였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문장가로서의 자질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영민한 자질과 문재(文才)를 타고 났던 그가 어린 나이에 신동(神童)으로 회자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다. 그가 원래 발랄한 재기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문재의 원천은 집안의 내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시경』·『예기』에 밝았던 권근(權近·1352~1409)과 변계량(卞季良·1369~1430)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이 그의 학문적 연원(淵源)이었음에랴.

이처럼 부족할 것이 없었던 그의 앞날이 파란만장할 줄을 누구인들 짐작했을까. 1405년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한 후, 태학(太學)에 입학한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인생의 황금기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던 기구한 그의 운명은 진정 무엇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집안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된 것은 조선 초기 정치적 혼란기에 일어났던 사건 때문이었다. 바로 그의 부친이 역모 죄에 연루된 것. 그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다. 부친 유기(柳沂)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방원을 돕던 민무구(閔無咎) 형제와 뜻을 같이 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 태종과 사이가 벌어진 민무구 형제가 역모 죄에 연루되자 그의 부친도 이들과 함께 참형을 당하고 만다. 태재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가산이 몰수되고, 식솔들이 유배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가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천(永川)으로 이배(移配)된 것도 이 일 때문이었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은 40세가 되던 해의 일이다. 원주 명봉산 아래 법천(法泉)로 거처를 옮긴 그는 비로소 안정을 찾은 듯했다. 원주의 법천학사에서 강학하며 후학을 양성할 때, 그의 학덕을 흠모했던 세종은 스승의 예로 대우하여 벼슬을 주고자 했지만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유배지를 떠돌면서도 학문과 강학에 열중했던 그는 조선 전기의 문단을 이끌었던 인재들을 길러냈다. 앞서 언급한 서거정과 같은 그의 제자들은 실제 조선의 시단을 이끌던 인물들로, 이들 또한 차를 즐겼다. 소박한 문인의 음다 풍속은 이렇게 이어졌던 셈이다.

그가 유배지의 어려움을 극복했던 힘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이것은 그의 깊은 학문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리라 짐작된다. 아울러 산림에 살며 차를 즐기는 소박한 일상의 즐거움은 마음의 의지처가 되기에 족했다. 그가 차나무를 심고, 무일사(無一事)한 일상의 한가함을 노래한 ‘즉사(卽事)’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년에 궁벽한 곳 좋아하여(晩歲愛幽獨)
인적 드문 산에 거처를 잡았네(卜居投遠山)
차를 심고 약초 밭을 일구며(種茶開藥圃)
대나무 심어 낚싯대 만드네(栽竹製漁竿)
봄빛에 (마음이) 산란하여 잠이 오지 않는데(春色惱無睡)
지저귀는 새소리가 적막함을 깨누나(鳥聲啼破閑)
누가 알리오. 초가집 아래에(誰知茅屋下)
한가하게 즐길 느긋함이 있는 것을(自有臥遊寬) 『태재집(太齋集)』 권1

유방선이 말년에 살았던 강원도 원주 법천 인근에 있는 법천사의 당간 지주.
이 시는 아마 영천에서 머물던 시기에 지은 듯하다. 만년이란 40세 이후를 말한 것이라 짐작되지만 원주에선 차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1431년에 ‘가족을 이끌고 법천촌사에 도착하여(挈家到法泉村舍)’라는 시를 지었으니 아마도 해배가 된 후에도 얼마 동안 영천에서 머물렀던 것은 아닐까. 더구나 영천은 차를 기를 수 있는 지역이기에 “차나무를 심고, 약초 밭을 일궜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를 좋아했던 그이기에 차나무를 가꾸며, 은자의 소박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대나무는 선비를 상징한다. 곧게 자란 대나무의 기상은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 선비의 청빈한 삶은 초가집이 제격이다. 물론 그의 처지는 초가집에 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무위(無爲)한 자연에서 도학의 이치를 탁마하는 은일한 선비에겐 “한가하게 즐길 느긋함이 있는” 공간으론 최상이었으리라. 더구나 그의 곁엔 자족할 차가 있으니 지족(知足)을 누리는 선비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하겠다. 실로 안빈낙도(安貧樂道) 할 수 있는 용기란 자긍심에서 나온다.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가에서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로(子路)가 군자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께서는 “경으로써 자신을 닦고(修己以敬), 자신을 닦아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修身以安人),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修身以安百姓)”라 하였다. 유방선은 바로 이를 실천코자 했던 선비였다. 하지만 죄인의 신세였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수기이경(修己以敬)’뿐이었다.

온 세상에 봄 기운이 화창하여 세상의 모든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툴 때, 이 광경을 바라보며 느낀 상대적인 상실감은 더욱 절절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봄날의 서정성을 자신의 처지와 대비한 ‘유감(有感)’은 절창(絶唱)이라 불린 만한 시격(詩格)을 갖췄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호탕한 천지의 기운, 따사로워지니(乾坤浩蕩氣方和)
온갖 꽃들 만발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내누나(萬枝千紅總自花)
슬프다. 그늘진 벼랑엔 아직도 봄기운이 전해지지 않아(惆愴陰崖春有恨)
초췌한 가지엔 꽃도 피우지 못했구나(一枝憔悴未開葩)

도판 국조인물고의 유방선 편
태재의 시어 속엔 고난의 흔적 가득
온 세상엔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하다. “호탕한 천지의 기운, 따사로워졌음”은 성군의 은택을 의미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태평성대엔 효자와 현신(賢臣)이 출현한다. 누구나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된 셈이다.

하지만 쓸쓸한 유배지에서 간난의 세월을 보내던 그에겐 임금의 덕화가 미치지 않았다. 그가 “그늘진 벼랑”이라 말한 것은 바로 해배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이리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해배를 기다리는 절절한 그의 심정은 그늘진 벼랑의 “초췌한 가지엔 꽃도 피우지 못했다”한 것과 같은 처지였다. 바로 그의 문재(文才)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와 깊이 교유했던 명곡스님이 열반한 후, 그를 회상하며 지은 ‘곡명곡상인(哭明谷上人)’에는 태재가 유배지를 전전하던 시절, 차를 나누며 명곡 스님에게 의지했던 시절의 인연사를 그림처럼 그려냈다.

만년에 환귀사에서 깊이 사귄 후(晩向還歸托契深)
객지에 있을 때도 항상 만났지(客中無處不相尋)
산사의 창가에서 종종 함께 차를 즐겼고(禪窓幾伴煎茶話)
주점에선 자주 달을 보며 시를 읊조렸지(酒店頻同對月飮)
오래된 절엔 이미 그 주인이 아니지만(古院已非當日主)
절 앞의 개울 물 소리만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前溪惟有舊時音)
이제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從今誰是知心者)
청산을 바라보니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回首靑龍悌滿襟)
『태재집(太齋集)』 권3

명곡 스님이 죽은 뒤, 환귀사를 찾았던 태재는 변함없는 환귀사의 정경에서 물상(物像)은 모두 공하다는 이치를 드러냈다.

“깊이 사귀던” 명곡 스님도 없고, 차를 즐겼던 시간과 공간도 옛날과는 다른 것. 매 순간 변하는 이치는 분명하였다. 그가 “이제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라고 한 말은 그 공명이 하도 커서 청산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그를 곁에서 보는 듯하다.

태재가 겪은 고난은 그의 시어 속에 가득한데, 그는 차에서 어떤 위안을 받았던 것일까? 다시(茶詩)를 읽을 때마다 일어나는 의문이기도 하다.



유방선 자는 자계(子繼)이다. 송도 방제에서 태어났다. 변계량과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영천의 송곡(松谷) 아래에 집을 지어 태재(太齋)라는 당호를 걸었다. 태재에서 이보흠 등에게 강학하였고, 40세에 해배 되어 원주로 돌아왔다. 시학은 두보의 시를 배웠다. 원주 법천으로 옮겨 아름다운 자연을 완상하는 시를 남겼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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