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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하나의 질문이 다른 여러 질문들을 껴안고 있는 경우가 있다. 사랑이란 질문 안에 미움과 희생과 후회와 용서 같은 질문들이 숨어 있듯이. 그러한 이치를 알면 인간과 세상을 보다 깊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향후 삶의 갈피갈피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를 일들이 꽤 될 것이다.

한 개인의 행로만이 아니라 한 국가의 운명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가령, 상상해보자. 만약 통일 대한민국이 실현된다면 주사파나 민족해방론(NL)자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언뜻 계산해보면, 북한이 소멸되면서 우리 한민족 전체가 비로소 통일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수렴됐으니 음으로든 양으로든 저들이 존속될 리 없을 것 같지만 나의 견해는 영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통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폭넓게 사고를 칠 주체는 평소 우리가 자부심에 차 의지하는 그 ‘민족’이라는 미신일 것이다. 그러니 민족해방론자나 주사파와 같은 병든 민족주의의 스페셜리스트들은 증발되기는커녕 더 독한 변종으로 진화해 형형할 공산이 적잖다.

이는 민족이라는 무지에 대한 우리의 기질과 착종된 우리 역사와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본시 반도에서는 제노사이드가 자주 일어나 발칸반도가 저 지경이라지만, 전 세계에서 민족주의가 드세기로는 1등이 북한이요, 2등이 남한인 것은 분명하다. 통일 대한민국에서 차별당하는 과거 북한의 인민들은 외국인들과 다문화적 요소들에 폭력을 일삼을 테고, 과거 남한의 국민들은 그러한 혼돈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길을 잃기 십상일 것이다. 통일 독일이 한참 그랬고, 우리는 그 수천 배의 하중을 견뎌내야 하리라.

민족이라는 개념은 대략 19세기를 거치면서 서구에서 생겨난 국민국가(nation-state)의 그 ‘네이션(nation)’을 일본인들이 ‘민족’이라고 번역하면서 동양으로 넘어온 것이다. 우리의 수많은 사회적 고질병들은 우리가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다. 우리가 고작 말만 똑바로 해도 필경 좌파니 우파니 하는 개와 고양이 싸움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왜냐. 최소한 자기들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날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만큼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대로라면 저 중동의 수니파와 시아파처럼 우리가 통일 대한민국 안에서 서로를 학살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인간은 자신이 정의로워서 으르렁댄다고 착각한다. 천만에. 우리는 욕망 때문에 물어뜯고 무식해서 원한을 갖는다. 우리가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민족이란 기실 종족인 셈인데, 이것 역시 민족처럼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망상에 불과하니 순결한 겨레라는 것은 말짱 새빨간 거짓말이다. 순결한 척 하는 것들은 다 악마의 자식임을 세계사는 증명한다.

민족국가라는 것은 곧 국민국가로서 누구든지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누리면 주권국민이 될 수 있는 나라다. 공상과학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는 “우리의 진정한 민족은 인류다”고 갈파했다. 우리는 세계인으로서 국민이 돼야 한다. 우리는 민족이란 허구를 감상화해서 몰핀을 맞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이렇게들 아무렇게나 사랑하고 쉽게 미워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증오와 비합리로 연명하며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우리가 아직 온전한 국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연옥인 것이다. 제 이념과 이득을 악쓰기 전에 우리들 각자는 스스로 근대인이 맞는지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대한민국은 아직 현대국가는커녕 근대국가조차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라의 주인이라는 우리들 자신 때문이다. 우리의 불행이 우리에게서 말고 다른 데서 왔을 리 없다.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다면 장차 해일처럼 닥칠 통일 대한민국은 기껏 연옥이 아니라 당연히 지옥일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민족이 아니라 국가다. 요컨대 민족과 같은 환각에서 깨어나 국가라는 과학을 자각하는 데 있다. 우리는 찡얼대는 가족이 아니라 무책임을 경멸하는 민주공화국의 국민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국가의 정신은 종족주의라는 낡은 단지 안에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술을 만들기 위한 효모다”라고 했다. 국가라는 질문 속에는 현재의 우리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질문들이 너무 많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우리는 우리의 이 사회과학적 무명(無明)을 정직하게 직시해 스스로를 치료하고 재활해야 한다. 끔찍한 소리지만, 그것 말고는 우리가 한 국가 안에서 함께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시간이 벌써 가까이 와 있다.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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