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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아저씨들의 ‘페르소나’가 벗겨진 사회

퇴근 중 한적한 길을 걷는다. 앞서 가던 여성이 힐끗 뒤돌아본다. 나는 발걸음의 속도를 늦춰 부러 거리를 늘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자주 주춤거린다. 젊은 여성과 단 둘이 타게 되는 상황은 되도록 피한다. 뒤따르는 ‘아저씨’를 향한 상대의 경계심에 대한 일종의 배려다. 이런 염려는 과연 기우인가. 물어보지 않으니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아마 아닐 것 같다.

“언제부턴가 아저씨로 살기가 더 피곤해졌다”는 이들이 있다. 공연히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지하철에서는 가급적 젊은 여성의 옆자리는 피한다. 술에 좀 취했다싶으면 대중교통은 이용하지 않는다. 거리에서의 ‘눈길’도 조심한다. 잠시 바라본 대상이 옷매무새를 고치는 순간 내 시선의 불온성 여부를 스스로 따져본다.

다른 아저씨들 탓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밤 거리를 헤매고 다닌 검찰 간부, 인턴 직원에게 몹쓸 짓을 한 고위 공직자, 여제자를 겁탈한 명문대 교수가 원흉으로 떠오른다. 그들은 모두 한 순간에 지킬 박사에서 하이드로 돌변했다. 본디부터 괴물은 아니었다고들 한다.

현실에서 멋진 아저씨는 별로 없다. 영화, 특히 외국영화에는 종종 출몰한다. 공통된 특징의 하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순수함이다. 한국 아저씨들이 좀처럼 갖기 어려운 특성이다.

집합명사 ‘아저씨’에 속하기 싫은 이유는 또 있다. 거짓말쟁이들 때문이다. “희생과 봉사”를 목놓아 다짐한 선량(選良)들이 탈 난 뒷돈에 대해 온갖 변명을 하다가 이리저리 도망친다. 바른 말 열심히 하던 방송사 앵커 출신은 과거에 소유했던 아파트에서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인사청문회에서 얘기한다.

나름 점잖은 분들이 갑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맨 얼굴을 들이댄다. 심리학자 카를 융이 말한 ‘페르소나(가면)’가 벗겨진 상황이다. 내내 보여줬던 ‘사회적 인격’이 허물어지고 가면 뒤에 도사리고 있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난다.

인격에 대한 타인들의 기대를 크게 받을수록, 즉 가면을 써야 하는 시간이 길수록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발동할 가능성이 크다고 배운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나 또한 위험군에 속하는 걸까. 점잖음까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는 직업집단에 포함돼 있다(또는 그렇게 믿는다).

가면을 벗어서는 안되는 때와 장소에서 민낯 노출의 욕구가 분출하지 않도록 하려면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 가끔씩 ‘솔직한’ 자신을 보여줘야 한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아저씨들에게는 술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 술이 종종 ‘가면 이탈’의 일탈을 부른다. 결국 어찌할 도리없이 이렇게 다짐과 호소를 동시에 한다. 동료 아저씨들이여, 모두 함께 정신줄 놓지는 맙시다.


이상언 사회부문 기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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