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책 수집광' 서유구...조선 농업개혁 꿈꾸다

   
 
풍석(楓石) 서유구(徐有 矩+木, 1764~1845)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8) 등과 아울러 19세기 학술사에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특히 서유구는 모두 박학을 중시하고 많은 책을 섭렵해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이는 가학의 전통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용후생의 삶을 실천한 서유구와 달성 서씨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 자리한 달성 서씨

서유구는 당대 경화사족으로 명성이 높았던 달성 서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달성 서씨는 약봉(藥峯) 서성(徐 水+省, 1558~1631) 이후 가문의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서성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광해군 때 오래도록 귀양살이했다가 인조반정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서성의 아들 서경주(徐景 雨+周, 1579~1643)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貞愼翁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됐고, 꾸밈이 없고 소박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조반정과 그 이후의 정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서문유(徐文裕, 1688~1745)는 예조판서를 지냈고, 서경주의 손자이자 서유구의 증조부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서종옥의 아들이자 서유구 조부인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아우인 서명선(徐命善, 1728~1791)과 함께 이들은 소론으로서 영조대 탕평정국 중심에 있었고, 정조 즉위 이후에는 정치와 학문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때부터 경화사족으로 유력한 지위를 점유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서명응의 아들 서호수는 서유본과 서유구를 낳았는데, 모두 가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서유본은 연암 박지원으로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특히 서유구는 조부인 서명응의 학문을 계승해 ‘임원경제지’를 저술해 가학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한양과 개성의 중간, 장단에 터를 잡다

달성 서씨의 세거지는 경기도 장단(長湍)이었고 선영도 이곳에 있었다.

현재 이곳에는 서유구와 그 선조들이 묻혀 있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검월봉 아래, 오늘날 파주 장단에 달성 서씨 가문이 세거하게 된 것은 오래됐다.

장단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개성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가깝고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 벼슬하기 용이한 곳이다.

조선 전기 명문장가였던 서거정(1420~1488)은 “장단은 개성과 서울의 사이에 있고, 중국 사신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번잡하며, 큰 목장이 있는 곳으로 사무가 복잡하다. 이곳에 나의 집과 조상의 산소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래전부터 달성 서씨 서유구 가문의 세거지였던 장단은 문화적·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서명응을 위시해 서호수와 서형수 부자가 청조 학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새로운 학문 방향을 찾게 된 배경이 됐다.

한편, 장단과 개성 일대는 ‘영남과 호남과는 성격이 다른’ 지역이었다.

학문적 전통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이래 경학(經學)과 상수학(象數學)을 중시하는 학문 전통을 보여 왔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과 도시적 성격을 배경으로 이곳의 지식인 계층은 농업에 종사하고 개방적인 학문 풍토를 유지하며 서울의 거족(巨族)과 연결돼 학문적·정치적 입지를 넓혀갔다.

서명응이 ‘북학의서(北學議序)’에서 ‘기술과 수학, 기기 등에 관한 이론이 견고하고 우리나라 선비들이 수학에 등한 것’을 비판하고, 그 아들 서호수·서형수 형제가 실용 학문에 매진해 역학과 수리에 특징을 보이며 농학과 역학·상수 등의 학문에 치중하게 된 것은 이러한 지역적·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달성 서씨 서유구 가문의 가학의 전통이 됐다.

달성 서씨 서유구 가문은 서명응부터 서유구에 이르기까지 농학을 가학으로 정립했다. 서명응은 1771년 ‘고사신서(考事新書)’를 지었고, 서명선은 ‘식목실총(植木實總)’(1782), 서호수는 ‘해동농서(海東農書)’,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와 ‘종저보(種藷譜’(1834)를 지었고, 서유구의 부인인 빙허각(憑虛閣) 이씨는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를 지었다.

이 가문은 3대에 걸쳐 6종의 농서 편찬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도시적 문화와 장서가, 풍석암(楓石庵)

달성 서씨 서유구 가문은 바로 서울 저동에 자리 잡았다.

조선후기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이에 따라 도시적 문화가 형성 발전하게 됐다.

도시적 문화는 향락적인 공간을 생성시켰고, 서화나 골동품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취미가 생겨나고, 중국으로부터 서적을 수입해 소장하는 장서가들이 등장하게 됐다.

달성 서씨 가문과 서유구는 바로 이러한 문화적 수혜를 받았다.

서유구는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 “금이나 담비털, 말이 끄는 초헌, 종정 등의 귀함을 모두 집에서 실컷 누렸으니 이제 외물이란 것은 나에게 더 이상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백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풍요롭고 화려한 서유구의 삶을 전해주는 말이다.

서유구는 그의 스승인 기하자(幾何子) 유금(柳琴)을 회상하는 글에서 “무릎을 서로 맞대고 앉아 시문을 얘기하고 서화나 금석각 등을 내어놓고 품평하고 감상하는 일이 늘 다반사였다”라고 했다.

서유구는 늘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이를 매개로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며 서화골동 취미 등 문화예술을 향유했다.

서유구의 이러한 문화예술적 향유 경험은 그 자신의 대표적인 실학저술인 ‘임원경제지’ 속에 녹아들어 향촌 사대부의 문화예술적 삶을 풍요롭게 꾸며나는 방안을 설계·제시하는 바탕이 됐다.



책의 역사를 기록한 방대한 장서

서유구는 박학을 추구한 학자였다. 당연히 많은 책을 보았고 이에 따라 장서 또한 많았다.

서유구 가문은 누대에 걸쳐 많은 서적을 소장했는데, 서명응과 서호수·서형수 부자가 중국에 연행사로 다녀오면서 중국의 문물을 보고 많은 서적을 구입해 소장했다.

서유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견문을 넓혀갈 수 있었다.

서유구가 제시한 서적 구입하는 방법은 독특하다.

첫 번째 종류별로 비교하며 구입하고, 두 번째 대립되거나 상대되는 학파의 서적을 구입하고, 세 번째 빠진 책이나 소략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을 구하고, 네 번째 같은 계통이나 동일한 성격 묶여질 수 있는 것을 모으고, 다섯 번째 시대에 따라 구입하고, 여섯 번째 학파나 유파의 전개양상을 살펴서 구입하고, 일곱 번째 최근에 작성된 목록에서 찾아 구입하고, 여덟 번째 관심 있는 서문이나 감상문을 통해 현존 여부를 따져 구입하는 것 등이다.

서유구는 장서가로서 책을 아끼고 수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장서를 체계적으로 모집하고 관리하는 것을 중시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수많은 재산을 소유한 재력가들이 재산을 관리하는 방법을 이용해 서적의 목록을 작성해 체계적인 관리하고 보관할 것을 강조했다.

서유구가 이처럼 체계적인 서적 관리를 통해 많은 서적을 구비하고자 한 것은 여러 학자들의 장점을 집대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가를 이루려는 이유 때문이다.

서유구는 우리나라의 문헌을 수집해 보존하고 정리하는데 노력을 경주했고, 역사가적 관점에서 시대를 통관하는 종합적인 관점을 중시했으며, 지식과 지식의 관계망을 만들고자 했다.

멸실되기 쉬운 자국의 서적을 체계적으로 모아 우리 역사를 완성하려는 이유였다.

자국 문학의 비조로 불리지만 전하지 않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을 찾아 간행하는가 하면, 역대 선인의 책을 모아 ‘소화총서(小華叢書)’라는 우리나라 역사서를 편찬하려는 계획을 진행하기도 했다.



달성 서씨 가학의 완성, 임원경제지

서유구는 자신의 다채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농민들이 현실에서 수행하고 있는 농법, 즉 농업기술을 파악하고 이를 크게 변통시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리고 조선의 농정을 개혁하기 위한 방책을 노심초사하면서 완성해 제출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임원경제지’다.

임원경제지를 완성하는 데 있어 서유구가 참고한 서적은 매우 많다. ‘해동농서’·‘고사신서’ 등 서유구 선대의 농서류, ‘농가집성’·‘산림경제’·‘과농소초’·‘북학의’·‘색경’ 등 실학 농서류를 비롯해, 중국의 농서들까지 약 800여종에 이른다.

서유구가 많은 저술들을 참고하고 인용하면서도 철저하게 지킨 원칙은 우리 농업 현실에 적합성 여부였다. 심지어 위도와 경도를 측정해 그 적용여부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는 농촌에서 거주하는 사족이 해야 할 바를 임원경제학으로 규정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종합하고 집대성해 후대에 남겼다.

서유구는 예술에 대한 조예와 문화 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지식 정보를 수집·정리·체계화하는 지식정보의 조직자였으며, 사변적 학문을 탈피해 실용적 학문에 주력한 학자였다.

그의 삶은 ‘임원경제지’에 반영됐고, 그 주제는 이용후생(利用厚生·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이었다.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유효하다. 김형섭(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인기기사]

·대폭 강화된 에볼라 검역…'빈틈'은 없나 [2014/08/09] 

·野, 세월호특별법 재협상 놓고 논란 확산 [2014/08/09] 

·남의 집 마당서 알몸으로 음란행위하고 용변까지 [2014/08/09] 

·그것이 알고싶다 동화의 집, 옴 걸려 사망한 아이…의사도 '충격 휩싸여' [2014/08/10] 

·‘한번만 더’원조가수 박성신 사망, 갑작스러운 죽음...왜? [2014/08/10]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위 기사는 중부일보 제휴기사로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중부일보에 있습니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