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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이순신이라는 수수께끼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2004년 초, 영화감독 두 사람과 대담을 진행한 적 있다. 당시 강우석 감독은 ‘실미도’가 개봉 2주 만에 400만 명을 모았고,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봉을 앞둔 참이었다. 이들은 ‘1000만 관객’ 운운하며 서로의 흥행을 기원했다. 제3자가 듣기엔 좀 황당했다. 직전까지 900만 관객을 넘긴 영화도 없던 마당이다. 결과적으로 ‘실미도’는 개봉 두 달 만에 사상 첫 1000만 영화가 됐고, ‘태극기 휘날리며’도 그 뒤를 이었다.

 흥행예측에 재주가 없는 건 1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올 여름은 대형 사극들이 여럿 경쟁을 예고한 참이라, ‘명량’이 이처럼 초고속 흥행돌풍을 일으킬 줄 몰랐다. 놀랍게도 개봉 8일 만에 700만 명 넘게 관람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관계자들에게 듣자니 첫날부터 50, 60대 이상까지 극장에 모였다고 한다. 여기에 휴가 절정기의 젊은이들, 방학을 맞은 자녀를 동반한 가족들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고루 봤다는 얘기다. 이리저리 귀동냥한 흥행 비결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누구나 아는 영웅, 누구나 결말을 아는 이야기가 얼마나 관객을 모을 수 있겠느냐는 개봉 전의 우려는 누구나 아는 이순신 장군이기에, 더구나 누구나 그 같은 영웅을 보고 싶어 하는 시대이기에 폭넓은 소구력을 발휘했다는 분석으로 바뀌었다.

 영웅이라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물릴 만큼 봐왔다. 이순신은 그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수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초능력을 지닌 것도,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처럼 막대한 부와 최첨단 장비를 갖춘 것도 아니다. 어벤져스 멤버들처럼 든든한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명량’의 전반부 상황은 갑갑하기 짝이 없다. 조선 수군은 궤멸되다시피 했고, 말단병사부터 장수들까지 싸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이순신은 조목조목 작전을 설명해 휘하를 설득하는 대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비장함만 북돋운다. 그런데 본격적인 해전이 시작되자 비범한 리더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투의 형세에 따라 조금도 주저 없이 정확한 지침을 내린다.

 과연 이런 영웅적 면모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는 직전에 임금에게 버림받아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이런 그가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것은,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조선을 지키려는 것은 극 중 그의 아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실은 개인적으로도 그랬다. 조직의 논리에 맞춰 운신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상식이라 여겨온 데다, 그처럼 앞뒤 재지 않고 온몸 내던지는 리더를 좀체 보지 못한 탓인 것 같다. 총체적 난국에서 이순신이 발휘한 투지는 보통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영역이다. 그래서 더 놀라울 따름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들과 달리 이순신이 실존인물이고, 그의 활약이 실화라는 것이, 400년 뒤에도 이 거대한 울림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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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