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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공인인증서를 위한 변명

이정재
논설위원
진작 사달이 날 줄 알았어. 다 그놈의 ‘천송이 코트’ 때문이야. 이젠 듣기만 해도 오싹해. 박근혜 대통령이 “(외국인이) 천송이 코트 아직도 (국내 온라인으로) 못 산다니 말이 돼요?”라며 언성을 높인 게 벌써 몇 번째야. 지난주에도 장관들을 불러 ‘보신주의’라며 혼쭐을 냈다지. 이쯤 되면 아무리 맷집 좋은 나라도 못 견뎌. 그러니 장관님들이야 오죽하겠어. 허겁지겁 대책마련, 9월부터는 나를 거치지 않고 천송이 코트를 살 수 있게 한다는군. 나야 좋지. 일 줄어들고, 욕 덜 먹을 테니. 그런데 내가 누구냐고? 문제의 주인공, 공인인증서야.



 돌아보면 나처럼 질긴 목숨이 또 있을까. 출생은 1999년. 고향은 서울이지만 혈통은 미국이야. 굳이 꼽으라면 마이크로소프트(MS) 가문 출신이지. 액티브X 환경에만 살아남는 결벽증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 나의 탄생은 한국 금융의 개가였지. 난 14년간 한 번도 뚫리지 않은 철통보안을 자랑해. 해커가 나를 훔쳐 암호를 알아내려면 수퍼컴퓨터로 60년을 돌려야 해. 해킹엔 무적방패란 말씀이지. 물론 가끔 사고가 나긴 했어. 그건 다 사용자가 컴퓨터를 잘못 관리해 암호까지 같이 유출된 경우야. 간혹 나를 낡았다고 흉보는 이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 국제적으로도 나는 완벽한 기술로 유명해. 보안의 핵심인 본인인증·부인방지·기밀성·무결성의 네 가지를 다 잘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지. 그러니 해마다 사용자가 늘어난 것 아니겠어. 작년엔 3000만 명을 돌파했어. 은행에 통장 가진 대한민국 국민은 다 나와 거래관계라고 봐도 돼. 이런 성과와 명성이 있으니 르완다·케냐·에콰도르에 수출도 하는 것 아니겠어.



 자랑만 해서 미안해. 사실 욕도 많이 먹었어. ‘쓰기 불편하다’ ‘뭘 자꾸 설치하라고 한다’ ‘MS 것 아닌 다른 브라우저로는 쓸 수 없다’ ‘컴퓨터가 자꾸 다운된다’ ‘해킹 통로다’ 누구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상대한 이들은 다 그런 소릴 하더군.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게 다 내 잘못은 아니야. 나만 아끼고 챙긴 정부 탓이 컸지. 금융감독원 산하에 인증방법평가위원회, 줄여서 인평위라는 게 있어. 여기서 승인을 해줘야 나처럼 보안인증 업무를 할 수 있어. 2006년 생긴 이래 인평위는 나 말고 다른 기술은 하나도 승인 안 해줬어. 아, 30만원 이하에만 쓸 수 있는 기술 2건은 승인해줬다더군. 게다가 위원장 포함, 10명의 멤버는 비밀이야. 이름도 성도 몰라. 알려주면 청탁·외압 때문에 곤란하다나. 요즘 대세인 투명성하고는 정 반대라고? 그래야 나만 싸고 돌아도 탓할 이가 없지.



 며칠 전 대통령의 ‘보신주의 금융’ 얘기를 전해 듣고 사실 뜨끔했어. 내가 바로 보신주의가 낳은 총아거든. 나를 통하면 금융회사는 면피가 돼. 보안사고가 터져도 국가가 대신 책임져 줘. 나를 인증해준 게 국가니까. 금융회사야 이보다 보신에 좋을 수 없지. 그러니 다들 나만 애지중지하는 거야. 아무리 불편해도 다른 걸 찾을 생각을 아예 안 해. 오죽하면 MS가 해킹에 취약하다며 액티브X를 버렸을 때도 한국 금융은 날 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니 9월 이후에 내가 사라질까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돼. 금융회사들이 나 말고 다른 인증도구를 쓴다고? 정보유출 사고라도 터지면 임직원이 책임 뒤집어쓰고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장담하지. 그런 일 절대 없을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보신은 금융업의 본질이기도 해. 고객 돈 잘 지키고, 이자 불려 돌려주는 것. 내 쓰임새도 그거야. 보신 잘 못해서 정권이 시키는 대로 아무한테나 퍼주면 어떻게 돼? 그러다 나라 망한 게 1997년 외환위기야. 대통령 뜻도 그건 아닐 거야. 4억 중국 중산층이 온라인으로 천송이 코트는 살 수 있게 하되 보안은 보안대로 잘하라는 거겠지. 벤처·기술 기업에 돈도 잘 빌려주고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알아. 금융 선진화 없이 선진국 된 나라가 없다는 거. 그런데 금융이 맨날 산업의 꼬랑지나 쫓아다녀서야 언제 선진화 되겠어.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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