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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1인당 21만1181원 부담 … ‘눈먼 돈’이라고 흥청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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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차관을 지낸 A씨가 한국종합유선방송협회 회장으로 이적하는 건 공무원 취업 제한 규정 위반 가능성이 높은 사례다.”

2006년 당시 서울행정학회가 국가청렴위원회(현 국민권익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만든 『공직자의 퇴직후 취업제한제도 개선방안 연구』의 최종 보고서 중 일부다. 문화산업진흥기금의 운용계획 심의·관리 등에 관여한 차관이 기금 수혜자인 케이블 방송사들의 모임인 한국종합유선방송협회 회장으로 취업한 걸 지적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규제권을 갖고 돈(기금)을 주무르던 관료들이 퇴직 후 그 기금을 지원받은 단체나 기업에 재취업해 밥그릇을 챙기는 ‘기금 전관예우’가 일상화한 것이다. 이는 정부가 운영하는 각종 기금이 관료들의 ‘쌈짓돈’으로 전락해서다. ‘관(官)피아(관료+마피아의 합성어)’들은 현직 때는 기금을 주무르면서 유관 단체와 산하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근 민주·한국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대책위원회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이하 알리오)를 분석해 조사한 결과 38개 중점관리기관(주요 공기업)의 기관장과 감사 중 50%가 정부 관료출신이었다. 비상임이사의 25%도 관료출신이었다. 총 133명의 공직 출신자 중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이 가장 많았다.

정부 기금이란 정부가 특정 사업 등을 위해 예산 외에 개별법에 의해 설치, 운용하는 자금을 말한다. 기금은 예산 외(off-budget)로 분류돼 예산과 별개로 운영되기 때문에 감시와 견제가 덜하다. 각 부처는 기금 적립금을 쌓아 놓고 그 이자로 사업을 하거나, 유관 단체나 기업들에 융자를 하는 방식으로 기금을 운용한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등에 따르면 정부가 현재 운용 중인 기금은 총 64개(적립금 1416억원)로 올해 운용 규모는 515조원이 넘는다. 정부 기금 중 상당 부분은 기업이나 개인에게 물리는 부담금 같은 ‘준(準)조세’로 구성된다. 해외 여행객이 내는 출국납부금(비행기 이용 출국시 1인당 1만원)이나, 전기료에 부과되는 전력산업기반기금(전기요금의 3.7%) 등이 대표적이다. 홈쇼핑업체들은 연간 영업이익의 13%를 방송통신발전기금으로 내야 한다.

기금으로 관·산하단체 함께 먹고 사는 구조
지난 7월 감사원은 “한국교직원공제회(이하 공제회)가 시중금리보다 높은 이자 지급과 무분별한 고(高) 위험 투자로 지난해에만 1조4000억원 상당의 결손을 냈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공제회는 예·적금 성격의 장기저축급여사업을 시행하면서 이자를 시중금리보다 2%포인트 이상 높은 5.15%를 주었다. 그런데도 공제회는 퇴직금 관련 규정을 고쳐 직원 1인당 퇴직금을 최대 1억5000여 만원 더 주기로 했다. 공제회가 낸 손실은 관련법에 따라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한국여행업협회는 올해 초 일본 여행업체 40여 곳에 수 억원을 지원했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줄자 일본 관광업체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집행한 광고·홍보비를 지원한 것이다. 돈은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진흥개발기금’에서 나왔다. 이 기금은 정부출연금과 출국납부금, 카지노사업자납부금으로 만들어졌다.

해외에 나가는 한국 국민이 낸 돈 1만원(출국납부금)을 일본인 관광객 대상 관광업체에 지원한 셈이다. 익명을 원한 관광업체 관계자는 25일 “홍보에 사용했던 광고 인쇄물 원본과 세금계산서 등 몇 가지 서류만 내면 쉽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감사원은 ‘정부 기금은 눈 먼 돈’이란 생각으로 흥청망청 쓰는 악습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나라 곳간이 부실해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정부기금운용평가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기금을 통해 관과 산하단체, 이익집단이 뭉쳐 함께 먹고 사는 구조”라며 “이렇게 관료들이 맘대로 쓰는 기금을 확 줄이면 관피아 문제도 상당수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 감사원은 정보화촉진기금과 방송발전기금 등 24개 정부 기금을 단계적으로 폐지해 정부 예산에 통합하라고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에 권고했다. 기금의 목적이나 필요성이 불분명하고 국가 재정의 효율성·투명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기금은 불로장생 … 없애기 힘들어
결과는 어떨까. 당시 지적을 받았던 기금들 대부분이 지금도 버젓이 살아있다. 58개였던 전체 정부 기금 숫자는 되레 64개로 늘었다. 기금은 만들긴 쉬워도 없애기는 힘들다.

일단 기금 운영 부처는 기금을 통해 산하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기금을 없애는 걸 꺼린다. 기존 기금 수혜자 집단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만만치 않은 저항을 한다. 기금 폐지를 막기 위해 각종 시위와 반대집회는 물론이고, 국회의원들도 끌어들인다. 기금의 경우 개별법에 근거해 운영되는 만큼 법안 수정 없이는 폐지도 불가능하다.

물론 정부도 기금에 대한 통제를 꾸준히 강화해 왔다. 2001년엔 기금의 존속 필요성 여부를 따지는 존치평가도 도입했고, 2006년에는 기금관리기본법을 폐지하고 국가재정법으로 통합했다. 하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 존치 평가는 아직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한경호 재정제도과장은 “현행법상 존치 평가에서 폐지 결정을 내려도 국회에서 이를 뒤집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이원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공공기관 연구센터 소장은 “결국 기금 개혁은 규제 개혁이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라며 “엄격한 존치 평가를 통해 목적 사업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목적을 다한 기금은 일반 예산에 통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금을 만들려는 시도는 여전하다. 올해 초 발의됐던 ‘콘텐츠산업진흥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콘텐트 산업 진흥을 위해 ‘상상콘텐츠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문제는 재원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정하는 기업(주로 게임업체)의 연 매출액 중 5%를 걷어 재원으로 삼자는 안이었다. 업체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기금이 늘어나면서 국민의 부담도 커진다. 전기요금 인상 때문에 전력기금 부담금 규모는 올해 2조912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보다 10.5%나 늘어난 액수다.

기획재정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이 알게 모르게 낸 준조세 성격의 부담금은 국민 1인당 32만6400원에 달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체 부담금 중 64.7%인 10조6127억원(국민 1인당 21만1181원)이 중앙 정부의 각종 기금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이원희 소장은 “새로운 기금 설치는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기획재정부의 기금 견제 권한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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