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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쓰러진 독일의 피 빨아먹는 프랑스 … 지켜보는 두 박쥐

그림 1 ‘Kladderadatsch’에 수록된 삽화(1919년 7월).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가 여성(독일)의 피를 빨아먹는 상황을 묘사했다.
그림 1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여인의 침대 아래쪽으로 독일군 철모와 칼과 방패가 놓여 있다. 방패에 그려진 독수리 형상은 두껍게 쳐진 커튼에서도 희미하게 보인다. 누워 있는 여인이 독일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무장해제를 당한 채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흡혈귀 노인은 누구일까?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이다. 이미 기력을 상실한 독일로부터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빨아먹으려 하는 표독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올해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유례가 없는 규모의 인력과 자원이 동원된 총력전이자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낳은 대재앙이었다. 4년간의 전쟁 끝에 영국-프랑스-러시아가 주축이 되고 뒤에 미국이 가입한 연합국 측이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제국의 동맹국 측을 누르고 승리했다.

그림 2 윌리엄 오펜(William Orpen), ‘1919년 6월 28일 거울의 방에서 거행된 강화협정 서명식’(부분).
승패가 확정되면 승자가 패배자에게 굴욕을 안기는 의식이 거행되기 마련이다. 그림 2는 바로 이 의식인 1919년 6월 강화조약의 체결장면을 보여준다. 그림의 중앙 앞쪽에 독일 측 대표 요하네스 벨이 등을 보이고 고개를 숙인 채 서명하고 있다. 이 모습을 연합국 측 대표들이 반대편에서 주시하고 있다. 가운데에 콧수염을 기른 클레망소 총리가 보이고, 그림의 왼편으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가 앉아 있다.

인물들 뒤편으로 대형 거울들이 늘어선 것이 인상적이다. 이 장소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Hall of Mirrors)’이다. 오늘날 베르사유 궁전을 찾는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이 방은 과거 여러 차례 역사의 주무대가 됐던 곳이다. 중상주의 시절에는 루이 14세가 유럽의 예술과 문화를 이끌었던 자부심 가득한 공간이었다. 1871년에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통일을 선포한 굴욕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제 역사가 다시 뒤집혀 1919년에 이곳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처절한 보복을 한 것이다.

독일에 330억 달러 전쟁배상금 물려
연합국 측이 마련한 ‘베르사유 강화조약’은 독일에 가혹한 내용들을 담았다. 독일은 전쟁 이전 영토의 13%, 인구의 10%를 빼앗겼는데, 특히 알자스-로렌과 자르와 같은 알짜배기 공업중심지가 포함됐다. 해외 식민지도 모두 잃었고, 군대도 무력화됐다. 더욱 치명적인 조항은 독일이 전쟁배상금으로 연합국에 330억 달러나 되는 거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복적 조치로 인해 독일인들은 절망했고, 현실적으로 패전국 독일이 이를 갚을 능력은 전혀 없었다.

이런 비현실적 내용이 조약에 포함된 데에는 연합국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연합국은 막대한 전비가 필요했으므로,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 이전에 순 채무국이었던 미국은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최대의 순 채권국으로 변모했다. 과거에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었던 영국은 미국에 큰 채무를 지게 되었고, 특히 국토 전역이 전쟁으로 파괴된 프랑스는 거액의 빚을 갚을 길이 막막했다. 전쟁이 끝나자 유럽의 연합국들은 미국에 채무 탕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유럽의 기대를 저버리고 냉담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유럽 연합국들은 프랑스의 주도로 대응책을 모색했는데, 이게 바로 독일에 전쟁배상금을 받아 미국에 대한 채무를 변제하겠다는 방안이었다.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낼 능력이 없었고, 유럽 연합국은 미국에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었다.

영국 대표로 베르사유 협상에 참가했던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조약이 독일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조치가 유럽 전체의 경제 회복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이 비판이 담긴 저서 『평화의 경제적 귀결』은 1919~1920년 출간되자마자 유럽과 미국에서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됐고, 케인스는 경제 부문의 최고 논객으로 떠올랐다.

케인스 “독일에 과도한 부담” 비판
케인스의 예상대로 유럽은 곧 본격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여러 나라에서 생산과 무역이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졌다. 가장 심각한 상황을 맞은 것은 독일이었다. 재정 적자가 증가하자 정부가 곧 세율을 인상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자산을 해외로 유출할 유인이 커진 것이다. 정치적 상황의 불안도 독일 자산의 해외 유출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따라 자본수지가 나빠지고 수입 상품의 가격은 더 올랐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겹침으로써 독일에서는 엄청난 수준의 초(超)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발생했다.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물가가 무려 1조2600억 배나 상승했다. 상황이 가장 나빴던 1922~1923년에는 한때 물가가 한 달에 3만 배 가까이 오르기도 했다.

그림 3 1923년 발행된 100만 마르크 지폐.
화폐의 가치가 이렇게 속락하자 대중은 화폐를 믿지 않았다. 기존의 돈다발은 교환의 매개가 아니라 불쏘시개나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정부도 정교한 디자인을 넣고 비싼 제작비를 들여 화폐를 찍어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림 3은 초인플레이션이 한창이던 1923년에 제작된 지폐다. 애초에 1000마르크짜리였던 지폐 위에 붉은색 잉크로 100만 마르크라고 인쇄를 했다. 어차피 머지않아 쓰이지 못하게 될 돈이지 않은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루르 지방을 강제로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사태는 헤어나기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독일경제는 추락했고 중산층이 얇아지면서 정치적으로도 극단적 주장이 널리 퍼져 민주주의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렸다.

전시 채무와 전쟁배상금을 둘러싼 갈등을 풀 실마리가 마련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1924년 미국이 제안한 도즈 플랜에 의해 독일이 배상금을 매년 소액씩 나누어 갚기로 했고, 미국의 차관이 독일로 들어가 경제에 다소나마 숨통을 열어주었다. 1929년 영 플랜으로 미국이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줄여주고 지급 기한을 연장한 이후에야 독일 화폐는 안정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세계질서 이끌 리더십 없어 혼란
유럽이 보여준 모습은 국제적 정책 공조와 리더십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세계질서를 이끌 리더십이 없었다. ‘런던은 그만, 워싱턴은 아직(No more London, not yet Washington)’인 환경이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이 자국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조그만 양보도 하지 않은 결과는 경제회복의 지연, 정치적 극단화, 그리고 재앙이 재발할 위험성의 증대뿐이었다. 이후 역사는 실제로 대공황, 블록경제, 나치와 군국주의의 득세, 재무장을 거쳐 2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되는 암흑기를 맞지 않았던가.

클레망소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림 1에서 독일의 피를 빠는 흡혈귀로 클레망소가 그려진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흡혈귀의 편에 있음이 분명한 창 밖을 맴도는 두 마리의 박쥐는 영국과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국가들 간의 협의와 공조라는 긍정적 의미의 세계화가 실종됐던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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