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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중도란 무엇인가

미워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와 사랑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 중 살기 좋은 나라는 어느 쪽일까? 너무 쉬운 질문이 아니냐고 코웃음치기 전에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누구나 다 읽은 듯 얘기하지만 정작 읽은 사람이 흔하지는 않은 『백범일지』는 여러모로 굉장한 가치를 지닌 책인데, 특히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대한 김구 선생의 회고는 현재의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기미년 대한민국 원년인 1919년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나 세계 사조가 이념 갈등의 창궐인 고로 임정 내부에서도 분파적 충돌이 격렬하였다. 심지어는 국무위원들끼리도 서로 으르렁대기가 일쑤였는데 가령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대통령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동휘가 은밀히 백범을 공원으로 불러내 아우님도 나와 함께 공산혁명에 참여하자고 꾄다. 백범의 반응은 단호해서, 공산주의는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가 중심이 돼 결성한 국제공산당 조직 코민테른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독립운동이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저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백범일지』를 뒤적이다 보면 이 대목 말고도 공산주의에 대한 백범의 경계와 경멸이 곳곳에 눈에 띈다. 따라서 마치 백범이 소위 진보 좌파의 정신적 태양처럼 오해받고 있는 것은 우파보다 좌파가 오히려 더 민족적인 색채를 내세우는 대한민국의 비틀린 팔자 탓이 크다. 게다가 뭔가 찔리는 게 많은 인간들은 너도 나도 백범기념관에서 백범의 숭고한 어깨 위에 맘대로 걸터앉아 선언을 하고 결성식을 한다. 그들이 백범에 대해 뭘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일까.

『백범일지』는 『난중일기』를 넘어서는 무인(武人)의 책이다. 백범은 17세 소년도 일제의 첩자로 판명되면 극형에 처했다고 담담히 술회한다. 백범은 불세출의 항일 독립운동가고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지만 현실정치에서는 실패한 사람이었다. 백범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이 아무리 비호감일지라도 어쨌든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되는 쪽에 줄 세운 것만큼은 정당하게 평가해야 하듯, 우리는 백범이 북한을 방문했을 적에 이미 소련공화국을 완성해놓은 김일성에게 느껴야 했던 절망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백범은 소위 진보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며 소위 보수 우파의 껄끄러운 상처도 아니다. 중도주의자 백범은 목숨을 걸고 민족의 상잔과 분단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것은 냉전의 시대 격류와 김일성의 야욕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우리의 중도 학살은 유서가 깊다. 조선왕조 내내 중도주의자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었듯이 백범은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이제 우리의 중도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바다 속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는 『광장』의 이명준이라는 나약한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중도만큼 정치적으로 래디컬한 입장은 없다. 극우와도 싸우고 극좌와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중도주의자는 그 어느 혁명가보다 치열하고 그 어느 애국자보다 중후하다. 흰 옷에 떨어진 피보다 선명한 중도는 회색주의가 아니다. 중도는 어설픈 화해를 거부하고 옳은 판단을 내려 행동하는 강력한 이성의 실현이다.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아닌 너의 무관심은 중용이 아니라 한갓 중간이며, 사랑할 때는 사랑하고 미워할 때는 미워하는 절도에 중용의 본질이 있노라고 우송(牛松) 김태길 선생은 갈파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대한민국 안에서 좌에게 이용당하고 우에게 휘둘리고 있는 중도주의자 백범에게 아쉬웠던 것은 정당성도, 의지도 아니었다. 오직 힘이었다. 실력 없는 중도는 그저 갈등하는 소수일 뿐이다.

우리가 백범의 정의로움을 존경하는 만큼 이젠 그를 기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의 정의로움을 비극의 자리에서 승리의 자리로 옮겨놓을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 길이 바로 사랑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며, 통일 대한민국을 해방정국 같은 이념 충돌의 생지옥으로부터 구해내는 간절한 기도일 터. 만약 이러한 희망과 노력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국가가 아니라 어둠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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