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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예슈아가 생각 바꿨다면 막달레나와 조용히 살았을까

‘부모님 집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존 에버레트 밀레(John Everett Millais, 1849-50).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낳은 어머니와 결혼할 거란다. 아들이 어머니와 부부가 돼 아이를 낳고 죽은 아버지의 나라를 다스릴 거란다. 테베(Thebe)의 왕 라이우스는 경악한다. 이보다 더 잔인한 예언이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먼 과거 자신의 제자 크리시스푸스를 납치하고 강간한 죄의 대가라는 걸 편리하게도 잊은 왕은 아들을 산 속에 버리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버려진 백설공주와 마찬가지로 라이우스의 아들 오이디푸스 역시 구해져 (꼭 기억할 것, 전설에선 산에 버려진 아이는 살아남는다), 먼 나라 왕과 왕비에게 입양된다. 아이는 청년이 됐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멀리,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야 한다. 그 ‘멀리’는 테베였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괴팍한 노인을 죽인 청년은 테베를 괴롭히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왕이 된다. 얼마 전 숨진 왕의 부인을 왕비로 삼고 말이다….

<28> 인간과 운명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봤자 결과는 뻔하다. 아니,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더 좋을 뻔 했을까? 아니, 가만히 있었더라도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같은 아리아(Aryan) 민족 후손들이던 고대 그리스·로마·게르만 인들은 ‘모이라이(Moirai)’, ‘파르케(Parcae)’, 또는 ‘노른스(Norns)’라 불리는 늙은 여신들이 어디선가 마치 실을 뽑듯 인간의 운명을 뽑고 있다고 믿었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64).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에서 보여주듯, 아리아인들의 세계관은 냉소적이었다. 즉 인간은 흠투성이고, 인간을 만든 신들 역시 흠투성이라고. 운명은 정해져 있기에, 삶은 마치 술에 취한 작가가 쓴 드라마와 같다고. 하지만 인간의 삶이 막장드라마라 해서, 배우가 대본을 무시하고 혼자 잘난 척 한다면? 배우들은 혼란에 빠지고 연극은 망치며 관객들은 환불을 요구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질 거다.

인생도 비슷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을 무시하는 순간, 세상은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 『시학(詩學) 1권』에서 주로 비극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그의 『시학 2권』에서 아마도 희극의 의미와 구조를 다뤘을 것이다. 희극이란 무엇인가? ‘코미디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Manandros)의 ‘신(新)희극’은 ‘고집스런 노인’, ‘교활한 노예’, ‘인색한 사람’같은 평범한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삶을 그렸다. 반면 아리스토파네스, 헤르미푸스, 에우폴리스 같은 고대 그리스의 ‘구(舊)희극’ 작가들은 인간·신·국가 같은 거대한 것들을 주제로 삼았다. 구희극 작품들을 주로 예로 들었을 『시학 2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해진 운명과 일치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eironeia’, 그러니까 ‘아이러니’라고 정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로마인에게 운명은 만물의 갑
피할 수 없는, 그리고 피해서도 안 될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만물의 미래.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에게 운명이란 만물의 수퍼갑(甲)이었다. 그렇다면 운명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바로 튀케(Tyche) 또는 포르투나(Fortuna)라고 불리던 ‘행운’이 있다. 행운은 하지만 언제나 눈을 가리고 있다.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연이란 말이다. 그렇지만 우연에만 맡기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소중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내 아이의 미래를 이미 정해진 운명과 예측 불가능한 행운에만 맡길 순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호수가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목수(tekton)로 일하던 아버지. 항상 피곤한 늙은 아버지를 돕는 착한 다섯 명의 아들인 야코브, 요세스, 유다스, 시몬, 그리고 예슈아(Yeshua). 갑자기 비명이 들린다. 나무에 찔린 예슈아의 손바닥 가운데서 붉은 피가 난다. 하루 종일 나무와 못과 대패와 씨름하는 텍톤의 손은 언제나 상처투성이다. 아버지는 말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은 다시 아물고 피는 마를 것이라고. 하지만 왜 그런 걸까? 미리암(Miryam, 고대 이집트어 ‘myr’는 ‘사랑스런’이란 뜻)의 가슴은 불길한 느낌으로 멈추는 듯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진지하기에 더 사랑스러운 예슈아.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며 꿈 꾸는 듯한 예슈아. 사랑스런 아들의 운명을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손바닥에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운명의 본질은 우연과 행운인가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에게 ‘운명의 의미’는 무의미한 개념이었다. 왜 오이디푸스는 그런 운명을 타고났을까? 크리시스푸스를 납치한 건 아버지 라이우스 아니었던가? 왜 아버지의 죄를 아들의 운명으로 풀어야 할까? 정답은 ‘그냥 그렇다’다. 운명의 본질은 우연과 행운이기에, 그리스·로마인들은 자신이 그저 오이디푸스 같은 운명을 타고나지 않은 걸 고마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게르만 야만인들의 칼과 창에 서서히 망해가던 후기 그리스·로마 시절. 천재 조각가 피디아스와 리시포스의 아름다운 조각을 부숴 성벽을 쌓고, 거대한 신전들이 거품같이 무너지던 시대. 최고의 지식과 문명이 미개함에 무릎 꿇던 순간 사람들은 묻는다.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모든 게 어차피 의미 없고 관심도, 동정도 없는 운명과 우연의 결과물이라기엔, 나약한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서글펐다.

인간은 희망이 필요했고 새로운 종교는 희망을 주었다. 손바닥에 커다란 못이 박히기 위해 예슈아는 나사렛에서 태어났다고. 그의 운명을 통해 인간은 구원될 수 있다고. 운명이란 질투와 성욕(性慾)으로 가득 찬 올림포스 신(神)의 유치한 장난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근처 부모님 집에서 안아주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이라고. 초기 기독교를 그리스 철학과 단단히 결합시킨 고대 로마의 종교철학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최고 기여는 바로 이거였다. 운명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그렇기에 운명의 본질을 위해 사는 것이 유일한 참된 삶이라고. 참으로 참신하고 놀랄 만한 가설이었다. 비슷하게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먼 훗날 “삶의 의지야말로 운명의 본질”이라고 명시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통치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
운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존재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일까? 개인의 의지를 통해 운명을 통치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의 본질은 결국 이거다.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력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우리 몸 분자구조들은 전자기장(場)을 통해 정해지며, 강한 핵력(electro strong force)과 약한 핵력(electro weak force)이 있기에 몸의 약 7×1027 개 원자들을 구현하는 쿼크와 전자·입자들이 존재한다. 지구는 적도 기준으로 시속 1670㎞로 돌고 있다. 위도 38도에 자리 잡은 한반도는 시속 약 1316㎞로, 지금 이 순간에도 돈다. 동시에 지구는 시속 1만8000㎞로 태양을 돌고 있고, 태양계 그 자체는 시속 82만8000km로 은하수 중심을 돌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다.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기에 인간은 적어도 물질적으론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Pierre-Simon, Marquis de Laplace, 1749∼1827)가 주장했듯 결정론적인 기계일 뿐일까? 물론 아니다. 자연의 확률적인 기본구조 덕분에 완벽한 예측도, 자연의 법을 무시하는 완벽한 자유도 인간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물질적 자유가 아닌 정신적 자유만큼은 가능할까? 생각만 바꿨다면 예슈아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까?

삶은 생각과 선택의 꼬리 물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인생은 물론 생각과 선택의 꼬리 물기다. 선택과 생각은 뇌로 하는 것이고, 뇌는 수천억 개에 달하는 신경세포들의 합(合)집합이다. 그 수많은 신경세포들을 단순히 ‘내가 원한다’란 의지 하나로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매우 순진해 보인다. 완벽한 자유 의지는 불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질적 실체를 가진 신경세포는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하지만 인간의 선택이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법칙에 따라 완벽하게 정해진다는 결정론적 주장 역시 라플라스 식(式) 착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다. 당구공 같은 하나의 이유가 다른 당구공을 치는 기계적 인과관계는 인생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이란 수많은 요소들(물리 법칙·유전·경험·학습·우연…)로 구성된 ‘선택의 풍경’을 통해 확률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의 틀은 정해져 있지만,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완벽한 ‘자유 의지’를 통한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을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란 존재가 만들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선택이란 실질적 점들을 연결해 뇌가 그린 가상의 ‘선’이 바로 ‘나’란 존재이며, ‘나’란 허상은 ‘선택의 자유’란 그럴싸한 스토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 하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면, 어쩌면 인류의 모든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운명’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운명이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하나의 꿈에 불과할 수 있겠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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