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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6·29 직전 軍 출동, 쿠데타 각오하고 막후서 저지

1989년 3월 21일 육군사관학교 제45기 졸업식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만난 민병돈 육사 교장(오른쪽). 그는 이날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 및 대북 유화 기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해 파문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1987년 6·29 선언으로 26년간의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국가안보라는 명분 하에 ‘최고 실세’로 군림하던 군의 안하무인(眼下無人)은 여전했다.

<10> FM 군인 민병돈

88년 8월 현직 언론인에 대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의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란 칼럼에 불만을 품은 군 정보부대 요원들이 출근길 그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그런 와중에 89년 1월 나는 군 취재를 맡게 됐다. 국방부 출입기자는 ‘3실(室) 출입기자’로 불렸다. 기자실·화장실·대변인실 외에는 출입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나는 군사보안을 이유로 과도하게 취재금지를 시키는 관행을 깨뜨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대표적 보도금지(embargo) 사항이 ‘3군 본부 계룡산 이전 계획’이었다. 서울 도심의 육·해·공 3군 본부를 3월 말부터 충남 신도안(현 계룡대)의 새 건물로 이전하는 계획인데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이미 수년간 공사가 진행돼 천하가 아는 사실이요, 외신에서도 줄곧 보도되는 데도 말이다.

나는 89년 3월 1일자 초판에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군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아침 서울에 배포되는 신문에는 기사가 통째로 날아갔다. 군은 조직적으로 내 집에 전화를 해 “빨갱이 새끼” “구속시킨다”고 협박했다. 실제 군사기밀누설죄로 나에 대한 구속을 검토했다. 테러나 연행에 대비, 결국 이틀간 나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노태우 대통령 앞에서 북방정책 비난
89년 3월 21일 육사 제45기 졸업식. 민병돈 교장은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은 채 식사(式辭)를 통해 노대통령의 북방정책 및 대북 유화 기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며,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조차 흐려지기도 하며, 적성국과 우방국이 어느 나라인지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매우 해괴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직 육군 중장의 이 발언은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켰다. 민주화 추진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군부 강경세력의 집단 반발로 인식됐다.

전두환 특전사 제1공수여단장과(왼쪽·대령 보직)과 민병돈 제2대대장(맨 오른쪽)이 1972년 지리산 훈련 상황을 참관하기 위해 헬리콥터에 타고 있다.
민병돈은 신군부 핵심세력인 ‘하나회’ 출신의 육사 15기 대표 주자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인물. 강직하고 소신이 강한 무장(武將)이란 평과, 상관도 못 말리는 독선적 인물이란 평이 엇갈렸다. 결국 민 교장은 스스로 사의를 표한 뒤 군복을 벗었다.

몇 달 뒤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의외로 동네 아저씨 같이 순박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그는 졸업식 당시 자기 행동에 대해 밝혔다. “대통령이 ‘북한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해 전방 군인들이 혼란에 빠졌다. 주적이 북한이 아니라면 왜 엄동설한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여론을 직접 전하고 싶었다.”

그는 또 대통령에 대한 경례는 행사 시작시 ‘임석상관에 대한 경례’ 한번으로 족하다고 했다.

“순서 단계마다 상급자에 대한 경례는 과공(過恭)이다. 난 과거부터 군의 이런 형식주의적 관행은 따르지 않았다.”

군 주변에서 민병돈은 ‘민따로’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대세나 관행에 따르지 않고 ‘따로’ 행동함으로써 사서 고생한다는 뜻이다. 확실히 그의 군 생활을 보면 그런 소리를 들을 만 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위계질서가 투철한 군대에서 그는 소신에 따른 ‘특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

60년대 군에는 식량과 군용품을 빼돌려 팔아먹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초급장교 시절부터 그는 상관에게 이를 지적하고 항의했다. ‘상납’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선거 때가 오면 공개적으로 여당 후보를 찍는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이라며 부대원들의 비밀투표를 독려했다.

부대원에 방탄복 입히고 실탄 사격훈련
민병돈은 전형적인 ‘FM(Field Manual·야전교범) 군인’이었다. 특전사 대대장 시절, 작전에 나가면 ‘폼나는’ 지휘관 텐트를 마다하고 허름한 사병텐트 속에서 함께 뒹굴었다. 지휘관이 적에게 노출되면 안 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킨 것이다.

훈련도 실전을 방불케 혹독하게 실시했다. 특전사령관 시절 88서울올림픽 테러에 대비, 즉응력(卽應力)을 기른다는 명분하에 부대원들 상호 간에 방탄복을 입혀놓고 실탄 조준 사격을 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부대원들이 동료를 겨냥, 사격할 것을 주저하자 사령관인 그가 시범 케이스로 직접 방탄복을 입고 부대원들이 자신을 쏘도록 했다(이 훈련은 너무 위험하고 무자비하다는 여론에 따라 후임 사령관 때 폐지됐다).

‘민따로’의 원칙주의는 85년 2·12 총선 때 빛을 발한다. 당시 연금에서 풀려난 YS와 DJ 등 민주화 세력이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자 전두환 정권은 총력전으로 맞섰다. 그러나 수도권 20사단장으로 근무하던 민병돈 소장은 평소 소신대로 ‘부정 선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육사 후배인 김진영 수도기계화사단장도 동참케 했다. 군에서는 난리가 났다.

원래 20사단장은 수방사령관(중장)으로 영전하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그러나 민병돈은 준장 보직(육본 정보참모부차장)으로 좌천됐다. 김진영도 경북 영천의 육군3사관학교 교장으로 밀려났다.

여차하면 청와대 점령계획까지 세워
87년 6월 중순 전국은 폭풍 전야였다. 6·10 항쟁을 계기로 전국이 준(準)소요상태로 접어들었다. 곧 군이 출동하고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될 것이라는 풍문이 퍼져나갔다. 민병돈 특전사령관은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만약 군이 출동한다면 그의 특전사가 최첨병으로 나설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군이 나서면 내란 상황이 될 것이다. 7년 전 광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태가 초래될 것이며 대한민국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이런 우려는 비단 민병돈만의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6월 19일 육군참모총장 발(發) ‘작전명령 제87-4호’가 떨어졌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 전군, 87.6.○일, ○시부로 소요 진압작전 실시
- 4개 사단, 6개 특전여단, 4개 군단 특공연대, 해병 2개 연대는 수도권 및 후방에 배속
- 부산·경남과 충남·북지구, 계엄사 운용
- 육군 예비: 특전사, 수기사, 항공여단
- 발포 명령은 선(先) 육본 건의 후, 승인하 조치…

상황은 급박해졌다. 이제 대통령 한 마디면 전군이 출동, 유혈충돌→무력진압→내전상태로 번질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민병돈은 즉시 육사 동기인 고명승 보안사령관을 만났다.

“군이 출동하면 다 망한다. 자네가 각하를 만나 명령 취소를 건의하게. 만약 누가 대표자라고 묻는다면 내 이름을 대게.”

고명승도 동감을 표시하고 즉시 청와대로 올라갔다.

민병돈은 만약 대통령이 건의를 무시한다면 즉시 휘하 707대대로 청와대를 점령하는 쿠데타를 감행할 계획이었다. 이미 도상 연습도 마쳤고, 방송용 대국민 성명서도 작성한 상태다. 당시 가까운 후배들로 이뤄진 수도권 부대 지휘관들의 동조도 자신했다. ‘문제는 대통령과의 의리(義理)다. 그러나 대한민국 장군으로서, 특전사령관으로서 개인적 인간관계보다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 먼저다.’ 그는 실패할 경우 총살이나 자결을 각오했다.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전 대통령을 만났다.

“각하. 군 출동 명령을 재고해달라는 군내 여론이 높습니다.”
“누가 주도하는가.”
“민병돈 특전사령관입니다.”
“뭐야 민병돈이?…”

순간 전 대통령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알았어. 가봐.”

전 대통령은 사실 ‘엄포용’으로 작전명령을 시달한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민병돈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다.

염려하던 군 출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며칠 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인 ‘6·29 선언’이 발표됐다.

가난한 휴가병 보면 여비 쥐어줘 보내
민병돈은 퇴임 후 일체의 공직 제의를 뿌리친 채 40여 년 전 마련한 서울 양천구 목동 집에서 중풍 걸린 아내를 수발하며 산다. 그리고 늘 허름한 점퍼를 걸치고 보수단체 모임에 나가 묵묵히 도와주고 나라 사랑을 실천한다.

그는 타고난 군인이다.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 서울 출신인 그는 만 15세(휘문중 3)때 6·25가 터지자 학도병으로 참전, 총상을 입기도 했다. 고된 군대생활도 그에게는 낙(樂)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엄하게 다뤘다. 원칙에 어긋나거나 꾀를 부리면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러나 가난한 휴가병에게는 주머니를 털어 차비와 닭 한 마리 사갈 돈을 쥐어줬다. 연대장 시절 참모들이 만들어준 기념패에는 ‘차갑고도 뜨거우며, 무섭고도 인정 많은 연대장님께’라고 씌어 있었다.

그의 집에는 지금도 수십 년 전 부하들이 찾아온다. 채소나 곡식을 가져오기도 하며, 자식 주례 부탁도 한다.

인간 민병돈을 볼 때마다 나는 ‘하심(下心)’을 느낀다. 불교 용어로 하심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다. 그는 위만 바라보기 쉬운 군대 계급 사회에서 드물게 아래를 보고 살아온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부하들이 제대로 대우받고, 원칙에 맞게 살며, 전투를 잘하는 군인으로 만들 것이냐가 그의 주관심사였다. 3성 퇴역 장성인 그는 골프도 안 친다. 자동차도, 휴대폰도 없다. 잘난 체 하지도, 무용담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와는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10년 전 신문사를 나와 고생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요즘 얼마나 힘들어. 식사나 해.”

우린 식당에서 설렁탕과 소주 한 병을 나눠 먹었다. 그날 그 점심이 지금도 내겐 잊혀지지 않는다.

얼마 전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저녁 무렵 그는 40년 전 대대장 시절 따르던 하사관(부사관)이 왕십리 지하철역 부근에서 라면집을 개업해 축하해주러 간다고 일어섰다. 육십 넘은 부하의 새 길을 격려하기 위해 시청 전철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팔순 퇴역군인의 뒷모습…. 순간 내 마음속에 뭉클한 무엇이 치밀어 올랐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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