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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정상과 비정상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인데도 일단 미루고 보는 못된 습관 말이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하루라도 빨리 맞는 게 좋은 줄 알지만 그게 참 잘 안 된다. 온갖 핑계와 구실을 붙여 마지막 순간까지 뭉그적거린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불길한 사태를 예감하면서도 치과 가기를 겁내는 내 심리가 꼭 그렇다. 그러니 갈수록 느는 게 임플란트다.



 “한 자도 쓰지 않은 원고지를 앞에 두고 연필을 두세 자루씩 깎아 보거나 손톱·발톱을 전부 깎아 보기도 하고, 최근 갑자기 늘어난 흰머리를 세거나 코털을 뽑아 고양이 코에 심어 보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다가 겨우 집필에 착수할 무렵에는 힘을 거의 다 써 버리는 식이다.”



 일본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81)의 에세이집(『바람에 날리어』)을 되는 대로 펼쳐 보다 소름 돋는 격한 공감에 탄성과 함께 눈물까지 한 방울 떨어뜨릴 뻔했다. 시곗바늘이 재깍재깍 돌아가는 절박한 순간에 어쩌자고 이쓰키는 손톱·발톱을 깎고, 자기 코털을 뽑아 고양이 코에 심는 것일까. 빚쟁이의 발자국 소리처럼 마감시간은 다가오는데 남이 쓴 수필집이나 대책 없이 뒤적이고 있는 내 꼬락서니라니…. 결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학창 시절 나는 막판 벼락치기로 근근이 성적을 유지했다. 개학 전날 한 달 치 일기를 몰아 쓰고 탈진하기도 했다. 공부는 평소에 꾸준히 하는 것이라는 선생님 말씀을 귀 따갑게 들었지만 힘들고 싫은 일은 무조건 미루고 보는 못된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소심한 탓인지 분간이 잘 안 된다.



 못 고치는 병은 안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발명해 낸 것이 ‘에너지 총량 불변의 법칙’이다. 평소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하든, 시간에 쫓겨 막판에 몰아치기로 하든 일정한 일에 투여되는 에너지의 총량은 똑같다는 나름의 개똥철학이다. 고통을 잘게 쪼개 고루 분산할 것이냐,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배치할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문제는 아니라는 자기합리화다. 정상과 비정상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자기변명이기도 하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시대의 화두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잘못된 관행과 비리,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작업의 캐치프레이즈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 뒤에 가려져 있는 적폐와 부조리를 바로잡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140개 국정 과제와 10대 분야 정상화 과제를 ‘수레의 두 바퀴’ 삼아 국민 행복과 국가 발전이 선순환하는 희망의 새 시대를 구현하겠다는 게 박근혜 정부의 국정 목표다.



 잘못된 관행이나 비리,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리나 부정부패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에는 별 차이가 없다. A가 보면 문제지만 B가 보면 문제가 아닌 비리나 부정부패는 거의 없다. 관행은 좀 다르다. 관행이라는 말 자체가 왠지 ‘잘못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어울릴 것 같은 부정적 어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관행이라고 무조건 다 나쁘고 잘못된 건 아니다. 시각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것들도 있다. A가 보면 비정상이지만 B가 보면 정상인 관행도 있을 수 있다. 함부로 비정상의 딱지를 붙여 척결 대상으로 삼을 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피부색이 검은 것이 정상이지만 유럽에서는 하얀 것이 정상이다. 피부색은 정상과 비정상을 따질 대상이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이다. 차이는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 차별하거나 배척할 대상이 아니다. 차이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회는 관용을 잃은 닫힌 사회가 된다.



 박 대통령이 지난주 청와대에서 여야 원내대표를 만났다. 모처럼 대통령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한 것 같다고 야당 쪽에서 오히려 후한 평이 나왔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 대표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의 소통이 뉴스가 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구호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대통령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여야 원내대표와의 만남은 시작에 불과하다. 각계각층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지역과 색깔을 초월한 탕평인사로 국민 대통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큰 비정상의 정상화다.



 고통의 순간을 막판까지 미루는 못된 습관에도 나름의 순기능은 있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인 영감은 미루고 미루다 정신적 에너지를 일거에 쏟아붓는 마지막 순간에 홀연히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창작의 고통스러운 마력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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