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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미지근한 사람

사무실 앞 던킨 도넛 가게 아르바이트 아가씨는 내가 무엇을 주문할지 안다. 가게에 들어선 내가 어깨에 맨 가방을 내려 지갑을 꺼내고 카드와 할인카드를 찾아 주문대 앞에 설 때쯤 그러니까 아직 “오리지널 블랙 한잔 주세요”라는 주문을 하기도 전에 아가씨는 벌써 오리지널 블랙 커피 한잔을 내 앞으로 내민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미지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열광해본 적이 없다. 나도 무엇인가에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그 무엇을 위해 몸을 던져본 적은 없었다. 가령 혈서를 쓴다든지 단식을 한다든지 몸에 기름을 끼얹는다든지 하는 일은 물론이고 한번 목이 터져라 외쳐보지도 못했다. 원래도 목이 약해서 조금만 크게 소리를 지르면 금세 목이 잠기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도 춥지 않고 그 밤이 제발 더디 새길 바란다던데 그 말이 맞는다면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해 보지 못한 것이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어도 한끼만 굶으면 배가 고팠고 추운 겨울에는 빨리 헤어져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던지는 사람을 보면 그 맹목과 헌신과 열정이 진심으로 부럽고 존경스러웠지만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도 마찬가지. 제대로 증오하기에 나는 투지도, 기억력도, 부지런함도, 끈기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애초에 애정이 없었으니까 미움도 모자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 됐든 철저하지 못하고 미적지근한 것이다.

나는 아무리 무더운 날에도 샤워할 땐 따뜻한 물을 좋아하고, 한여름에도 커피는 역시 따뜻한 쪽을 선택한다. 더러 아이스커피를 주문할 때도 있지만 두 모금 삼킬 때쯤 후회하고 만다. 아메리카노처럼 뜨거운 것도 별로다. 그래서 오리지널 블랙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다.

내가 단골이긴 하지만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나를 기억하는 데는 기억할만한 마주침이 있었다. 도넛 가게는 아침 7시에 문을 연다. 하루는 6시 50분쯤 가게 앞에 서서 7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가씨가 문을 열어주며 들어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아직 불도 켜지 않은 가게 안으로 말이다. 그 작은 친절이 고마워서 나는 아가씨가 테라스에 의자 놓는 일과 입구에 엑스배너 내는 걸 도와주었다. 사실은 도와주는 시늉을 한 것이지만. 그 후 아르바이트 아가씨는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 내가 가게에 들어서면 유독 밝은 얼굴과 목소리로 목이 터져라 인사하니까.

사무실 앞 던킨 도넛 가게 아르바이트 아가씨는 내가 무엇을 주문할지 안다. 가게에 들어선 내가 어깨에 맨 가방을 내려 지갑을 꺼내고 카드와 할인카드를 찾아 주문대 앞에 설 때쯤 그러니까 아직 주문을 하기도 전에 아가씨는 벌써 오리지널 블랙 커피 한잔을 내 앞으로 내민다. 아가씨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견습생 명찰을 단 어린 아르바이트 아가씨는 감탄과 경악과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떻게…?”
“단골이시니까.”

단골인 나는 전날 술을 마셨기 때문에 아이스커피가 간절했지만 차마 그렇게 주문할 수 없었다. 아가씨는 아르바이트 선배의 관록이 묻어나는 웃음을 견습생에게 짓고 있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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