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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장머리' 엄포보다 '산책 시위'가 일본에 먹혔다

중국과 대일외교 공조 이 두 사진에 답 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망언을 일 삼는 일본을 상대로 ‘협공’을 했다. 왼쪽 사진은 11월 14일 두 정상이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전 악수하는 모습. 김 대통령은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말해 일본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오른쪽 사진은 나흘 뒤인 18일 일본 오사카 APEC 정상회의에서 두 정상이 산책하는 모습. 무라야마 총리가 회의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태연히 산책을 즐기며 일본 정부를 향해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중앙포토]

#1. 1995년 11월 14일. 중국 국가주석으로서 처음 한국을 찾은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에 함께 섰다. 공동기자회견에서 두 정상은 한목소리로 일본을 규탄했다.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한·일 합방은 합법” 등 망언을 잇따라 내놓던 터였다. 장 주석이 “중국 국민은 일본의 과거 침략 행위, 특히 난징 대학살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일갈했다. 김 대통령은 한층 강도를 높였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된다. 이번에는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 문민정부는 과거 군사정부와는 다르다는 것을 일본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 산케이신문은 김 대통령이 ‘당돌한 언급을 했다’고 보도했다.

 #2. 나흘 뒤인 11월 18일 일본 오사카에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렸다. 오후 행사 시작 직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회의장 입구 에서 각국 정상들을 맞이하던 때였다. 계단을 반쯤 올라간 장 주석이 갑자기 몸을 틀어 계단 밑에 있던 김 대통령 쪽으로 오더니 두 정상이 태연히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무라야마 총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시 공보·정무비서관이었던 박진 전 의원은 훗날 저서에서 이를 ‘산책 시위’라 이름 붙였다. 그는 “김 대통령의 즉석 제안으로 두 정상은 보란 듯이 의기투합해 산책을 즐기며 일본 정부에 노골적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고 썼다. 무라야마 총리는 속이 쓰렸겠지만, 두 정상이 범한 ‘의도적 결례’는 별로 회자되지 않았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방한(3~4일)을 앞둔 지금도 19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의 역사 왜곡 도발은 이어지고 있고 한·중이 한목소리로 일본을 비판하는 것도 꼭 같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과 시 주석이 일본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내놓느냐 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한·중 양국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으로 역사 갈등을 겪었지만 수년 전부터 공조 모드로 돌아섰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 등으로 일본과 대립각을 세워온 중국이 동북아에서 일본 팽창주의에 대항할 파트너로 한국을 선택해 ‘통 큰 선물 공세’를 벌여오고 있다. 하얼빈역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만들고, 시안시에 광복군 표지석을 설치했다. 특히 최근 잇따라 일본 제국주의 만행의 증거를 공개하고 있는 중국 지린성기록보관소는 일본의 도발에 역공을 펼칠 핵심 무기다. 일제가 패망 직전 미처 소각하지 못한 10만 권 분량의 문건에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부터 난징 대학살, 731부대 생체실험 등 일제 침략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중 간 역사공조는 한층 두터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궁극적으론 같은 목소리를 내더라도 원칙적으로는 양국이 각기 대응을 하고, 공조를 공식화해선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중·일 갈등과 한·일 갈등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한·일 갈등의 핵심은 역사 문제 그 자체다. 일본이 올바른 역사 인식과 반성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가 악화하는 것이지 경제·안보 측면에서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북핵 대응을 위한 한·미·일 안보 공조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에 일본은 관계 개선의 대상이지 배척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사 갈등만 풀리면 한·일 관계는 어떤 나라보다 긴밀한 관계 구축이 가능하다.

 반면 중·일 갈등은 동북아 지역에서의 패권 경쟁 성격을 띠고 있다. ▶군사·안보 분야에서의 격돌 ▶해양대국으로서 제해권 충돌 ▶미·중 대리전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방공식별구역에서 양국 전투기가 30m 이내로 접근하는 물리적 충돌 양상이 드러나는 배경이다.

 주중 대사를 지낸 한 고위 공직자는 “향후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나 통일 등을 염두에 둔다면, 대놓고 중국과 함께 역사 문제로 일본을 압박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드러내놓고 중국과 대일 견제를 공식화해 ‘외교적 레드라인’을 넘을 필요는 없다는 취지다.

 역사 문제가 한·중 대 일본 구도로 굳어지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위안부 문제처럼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문제가 역내 국가 간 갈등이나 양자 문제로 축소 인식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실익도 크지 않다.

 중국은 양국 정상이 일본에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정책연구원 김한권 중국연구센터장은 “한·중이 힘을 합쳐 일본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국제사회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더 효과적”이라며 “정상회담에서도 함께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우려하는 선언적 규탄을 하는 수준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동성명에 북핵 언급”=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1일 기자회견을 통해 “양국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 추진에 대한 일정한 공통 인식에 도달할 것”이라 고 밝혔다. 또 “양국은 자연스럽게 일본(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지혜·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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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