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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철학과 전술 없는 한국 축구의 민낯

정윤수
스포츠·문화 평론가
“모든 것은 나의 전술 실패다.”

 홍명보 감독의 말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누구는 말한다. 동기 부여가 없었다고, 그래서 정신력이 약해졌다고. 이 무슨 철 지난 노래인가. 애국심을 측량하는 기계라도 있단 말인가. 정신력이니 애국심 같은 말들은 시청률 경쟁에 사활을 건 방송사들이 비장한 효과음 깔면서 경기 예고 할 때나 써먹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마저도 21세기에 어울리지 않게 조잡하다. 얼마 전까지 홍명보 감독을 독립 영웅처럼 떠받들더니 지금은 ‘으리(의리) 축구’ 운운하며 동네 강아지 취급을 하는 이 졸렬한 상황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구는 말한다. 런던 올림픽 동메달로 군 면제 받은 선수들, 16강 진출 못 했으니 입대시켜야 한다고. 손흥민이 열심히 뛴 것은 군 미필이라서…. 이 정도야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씁쓸한 농담인데, 아예 어떤 사람들은 공항에 가서 엿을 던진다. 나는 그들에게 2010년 7월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 8강전에서 독일에 0대4로 대패한 아르헨티나 대표팀. 그들을 맞이하러 공항에 나온 수천 명의 팬들 때문에 마라도나 감독과 선수들이 탄 버스가 1m 가는데 10분 걸린 풍경 말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스페인과 잉글랜드가 졸전 끝에 짐을 쌌다. 그러나 그 나라 팬들은 “사과할 필요 없어요. 당신들과 더불어 행복했어요”라고 외친다. 팬심이란 이런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중남미 팀들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지구의 어느 대륙에서 월드컵이 열린다 해도 철협쌍웅의 기개세를 보여주는 팀이지만 여기에 칠레·코스타리카·콜롬비아·멕시코·우루과이 등이 용쟁호투를 보여줬다. 120분 동안 브라질을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붙였던 칠레, 성취 동기 이상의 어떤 신탁의 부름을 받은 듯한 코스타리카, 기교와 속도가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멕시코를 기억하자.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기후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전술 특징은 ‘스리백’이다. 그런데 세 명의 수비가 안방 지키기에 치중하는 과거의 스리백이 아니다. 한동안 세계 축구를 지배했던 포백을 깨기 위해 나온 공격형 스리백이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중흥을 이룬 도르트문트의 위르겐 클롭 감독이 이 전형을 쓴 대표적인 인물이다.

 스리백을 세우되 중원까지 끌어올린다.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수시로 백업해 최대 파이브백까지 선다. 이탈리아에 귀국 티켓을 선물한 코스타리카의 호르헤 루이스 핀토 감독은 “2006년부터 피를로를 연구했다. 그의 패스를 끊어야 이탈리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겐 프레싱’, 즉 극단적 전방 압박을 앞세운 이 전술의 특징은 역습 시 좌우로 벌리거나 짧은 패스로 공간을 만들기보다 일제히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반 할 감독은 이 전술로 스페인 패스축구의 혈도를 끊은 후 곧장 앞으로 전진했다. 판페르시와 아리언 로번의 숨 막힐 듯한 속도. 그리고 슛이 터진다. 전진 또 전진!

 120분 동안 총 145㎞를 거세게 달린 칠레(브라질은 136㎞)를 막았던 것은 브라질 수비가 아니라 골대였을 뿐이다. 전방 압박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 칠레의 호르헤 삼파올리 감독은 승부차기 패배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신 승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내 축구에 계산되지 않는 것이다.” 알제리의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도 이를 실천했다. 그는 말한다. “한국 선수들의 기술은 좋다. 그러나 팀 전체는 정형화(Stereotype)돼 있다. 창의적인 경기를 하라.”

 일부 보도에 따르면 한국 선수단이 다 함께 모여 알제리 팀을 제대로 분석한 게 겨우 경기 3일 전이었다고 한다. 알제리는 골키퍼를 제외하고 무려 5명이나 새로 기용했다. 전방 압박이 가능한 선수들을 앞세워 초반부터 거세게 밀어붙인 후 엄청난 속도로 세 골을 몰아넣었다. 급변하는 패러다임을 응시하는 철학이 없으니 전술이 없었고, 실사구시의 분석이 없으니 대응 방략이 부재했다.

 여기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에 대한 연구는 기본이다. 이를 충분히 숙지한 감독이 활용 가능한 자원을 최대한 조련해 팀을 구축해야 한다. 세계 수준의 축구는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홍명보 감독을 비롯한 모든 축구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축구협회가 할 일이 이것이다.

 축구는 활활 타오르며 급변하는 생물이다. 이 변화를 놓쳤다. 전술은 끝없이 변하고, 경기장은 극한의 실험장이다. 게다가 축구는 그저 경기의 한 종목이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적 총체다. 그 나라의 근현대사, 사회 환경, 문화적 특징, 최근의 정치 상황 등이 공 하나로 집중된다. 이 모든 그라운드 밖의 정보를 연구해 그라운드 안의 선수들에게 투영하는 작업이 전혀 없었다. 조 주첨 때부터 알제리의 풍부한 지중해 역사와 그 열렬한 축구 문화를 무시한 채 그저 ‘16강 제물’이라고 얕잡아 보았던 철학의 부재, 전술의 부존, 이것이 한국 축구의 민낯이다.

정윤수 스포츠·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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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