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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힐링, 제5의 욕망을 깨우다


언제부터인가 향기가 급속도로 우리 생활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남녀 불문 향수는 기본이고, 꽤 비싼 향초에도 지갑 열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나쁜 냄새만 안 풍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인이 왜 갑자기 좋은 향기에 집착하게 된 걸까요. 빡빡한 현실 속에서 나를 대접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하는 거라네요. 무슨 얘기인지 한번 알아볼까요.


나를 위한 특급 위로가 필요해

“20대 때는 외국여행 다녀올 때 다들 면세점이나 비행기에서 향수 하나씩 사지 않았나요. 선물용으로요. 누구 생일 때도 적당한 선물이 떠오르지않으면 향수를 자주 샀어요. 많이 받기도 했고요. 재밌는 건 그렇게 서로 주고 받았는데 정작 제대로 뿌려 본 기억은 별로 없어요. 향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뿌리기엔 좀 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나쁜 냄새만 안 풍기면 되지 무슨 향수씩이나, 이런 게 당시의 일반적 정서였던 것 같아요. 오히려 누가 좀 진하게 향수 냄새를 풍기기라도 하면 다들 뒤에서 ‘쟤, 왜 저래’ 그러면서 흉봤다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점점 향에 관심이 많아져요. 빨래할 때 향 좋으라고 세탁기에 향기지속제 넣는 건 기본이고요.” -금융회사 다니는 문정현(45·잠원동)씨.

향수. 20여년 전, 아니 불과 5~6년 전만 해도 서양 사람들을 위한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선물용이라면 또 혹시 모를까 자신을 위해 일부러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화장품 사용량에 있어 타의 추종의 불허하는 한국 여성이지만 유독 향수에는 인색했다. 자기 몸에 뿌리는 향수에는 그나마 관대한 편이었다. 향초나 디퓨저(방향제) 등 공간에 향을 불어넣는 다양한 제품은 아예 국내에서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데 2012년. 갑자기 달라졌다. 향 관련 제품 판매가 급증한 것이다. 롯데백화점 이동욱 상품기획자(MD)는 “올 상반기 향수 매출은 전년 대비 20%이상 늘었다”며 “지난해 전체 화장품 매출이 2012년에 비해 7.5% 마이너스 성장을 한 걸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말했다. 또 이 백화점 오세은 선임상품기획자(CMD)는 “향초나 디퓨저 등 리빙퍼퓸(생활 향수)은 2012년 이후 연 250% 신장하고 있다”며 “과거엔 선물용이 많았지만 요즘은 본인이 쓰려고 사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2008년 국내에 처음 들어온 프랑스 향수 전문 브랜드 딥디크도 2012년 이후 매년 매출이 100% 이상 늘고 있다. 갤러리아 백화점은 올초 이 브랜드의 홈 프래그런스(home fragrance·공간용 방향용품) 제품만 모은 매장을 웨스트(구 생활관) 5층에 열기도 했다. 수입사 BMK 박찬근 대표는 “2003년 한 백화점에 향수 편집매장을 냈을 때만 해도 매출이 신통치 않아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는데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힐링에 대한 욕구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국인이 그동안 그토록 외면해온 향이 뒤늦게 인기를 끄는 걸까. 심리학자와 경영학자, 의사 등 전문 분야별로 해석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힐링에 대한 욕구라는 분석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낸 보고서에서 “2010년 이후 경기부진 장기화와 취업난 등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힐링에 대한 니즈가 급증했다”며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 힐링 열풍이 불며 관련 산업이 본격화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2011년 한국사회에 힐링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향 관련 제품 매출이 급증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향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힐링과 관계된 것”이라며 “최근 의학계나 경영업계에서는 충전을 위해 ‘뇌를 놀리라(쉬게 하라)’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향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주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자학과 연구교수는 “경기 침체 등으로 경제적, 사회적 불안이 늘면서 향을 통해 힐링을 하려는 경향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향수 등 관련 제품은 고급스런 작은 사치품”이라며 “2012년말부터 ‘라운징’ 트렌드, 즉 자기 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대접하는 소비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성영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도 “좋은 향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힐링 효과가 있다는 연구가 많다”며 “우리 사회의 긴장 수준이 높아지다 보니 이를 가라앉힐 게 필요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성 교수는 또 “럭셔리 핸드백 구매는 사치나 허영으로 보일 수 있어 죄책감을 유발하는 데 비해 향수나 향초 등 향 관련 제품은 건강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있어 자기 합리화가 쉽다”며 “돈 쓰면서 죄책감을 안 느껴도 되니 맘 놓고 소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보대행사 컴101 박성희(51)대표는 이 해석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는 “하루종일 일로 시달리면 힐링을 좀 받고 싶은데 그때 가장 간편하게 할 수 있는 게 향초나 디퓨저 등을 사용하는 것”이라며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나 스스로에게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향 관련 제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경쟁적이 되니 감성적인 걸 찾게 되고, 향에 더 끌리는 것”으로 설명한다. “향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며 자기 자신을 대접하려는 행위는 인간이 욕구를 해소하는 가장 최상위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와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후각, 다른 감각보다 더 강력한 자극”

향의 어떤 특성 때문에 다들 향을 통해 힐링을 한다는 것일까. 이는 후각이 다른 감각기관과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는 것과도 관련있다. 예컨대 시각·청각 등의 감각기관은 변환 단계를 거쳐 뇌에 전달되는 반면 후각은 곧장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 우뇌 변연계로 전달되는 강력한 자극 요소라는 거다. 미국의 브랜딩 전문가인 마틴 린드스트롬은 그의 책 『오감브랜딩』에서 “향은 상상, 감각, 기억, 연상을 불러 일으킨다”며 “냄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실제로 우리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외국계 식품회사에 다니는 박정신(35·방배동)씨는 “좋은 향이 나는 사람을 보면 귀족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며 “지나갈 때마다 고급스런 향을 풍기는 회사 선배가 있는데 왠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좋은 향을 맡는 순간 즉각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손영화 계명대 심리학과 교수는 “향은 기억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변연계에 작용하는만큼 한번 좋은 향을 경험하면 무의식적으로 뇌가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경험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단 한번 경험하면 그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강하고 지속적인 자극(향)을 원한다는 얘기다. 손 교수는 “먹고 살기 힘들 때는 악취가 나도 참았지만 이제는 좋은 향이 나야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과거엔 섬유 탈취제 정도로 만족하다 이제는 세탁할 때 옷에 좋은 향을 배게하는 향기지속제 정도는 써야 만족하는 수준이라는 얘기다. 또 남들 다 쓰는 비슷비슷한 향수를 쓰다가 좀더 차별화되고 고급 향수로 점점 더 눈을 돌리기도 한다.

관련 제품 판매 추이만 봐도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P&G 다우니의 브랜드 매니저 정우종 부장은 “지난해 7월 향기지속제 아로마 쥬얼 출시 이후 판매 실적이 매우 좋다”며 “침체됐던 전체 패브릭케어(탈취제 등 포함) 시장을 다시 살려놨을 정도”라고 말했다.

자기만족형 소비 트랜드도 한몫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보다는 소득수준 향상에 따른 자연스런 단계로 보기도 한다. 남명우 성균관대 경영학과 교수는 “개인의 만족을 위해 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소비행태”라고 말했다. “럭셔리 제품 구매에서도 초기엔 남에게 보여주려는 상징적 의미가 크지만 점차 개인의 만족을 위한 게 크다”며 “남이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보희 갤러리아백화점 화장품 바이어는 “뷰티 시장은 일본을 그대로 따라간다”며 “일본에서 우리보다 몇 년 앞서 향에 대한 붐이 일었고, 그 트렌드가 지금 한국에 넘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샴푸와 세탁세제 등 생활용품 대부분에 향기를 강화한 제품을 내놓은 애경측도 “일본에서 2010년 이후 향기 제품이 인기를 모았고 국내에서는 2012년 이후 관련 제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계기가 무엇이든간에 국내에서도 향 관련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향기를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곳이 늘고 있다. 광고기획사 이노션 노경화 과장은 “감성 브랜딩의 한 축으로써 향기와 직접 관련 없는 산업 영역의 제품에도 향기를 끌어들이는 센트(scent) 브랜딩 관련 연구가 속속 진행되고 있다”며 “시각·청각에 비해 후각의 영향력이 뒤늦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현대·기아차가 시그니처 향수를 만든 거다. 현대차는 2011년 세계 3대 향수 제조사인 피미니시와 협업해 차 전시장 전용 향수를 개발했고, 기아차는 유명 조향사에게 의뢰해 방향제를 출시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향기 마케팅은 벤틀리나 롤스로이스 등 유명 차 제조사에서 이미 했던 방식이다.

힐링을 위한 간편한 도구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향 관련 제품을 찾고 있지만 이런 현상 자체가 거꾸로 각박해진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강동우 성의학클리닉 강동우 박사는 “과거엔 가족이나 친구와 교류하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면 이제는 그걸 충족할 수 없어 향으로 대체하는 것”이라며 “향의 인기를 꼭 좋은 현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안혜리 기자 , 윤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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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