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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하이데거 - '고흐의 구두는 세계를 담고 있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는 독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항상 인간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돼야 한다고 보았다.

월간중앙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구두를 그렸다. 비록 정규 수업을 받지도 않았고 늦게 그림을 시작했지만, 습작의 시기를 지난 이후의 그림들은 일관되게 고흐의 고유한 서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가 그린 구두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고흐의 그림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거친 붓 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물이나 사물 혹은 풍경을 묘사할 때 큰 붓이나 나이프, 혹은 직접 자신의 손가락을 이용해 거칠고 투박한 면으로 물감을 두툼하게 칠했다. 그래서 거친 붓질이 화면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붓질도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면처럼 보인다.

우리가 고흐의 그림에서 느끼게 되는 감명은 그가 그린 대상의 섬세함보다는 그의 거친 붓질과 색면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고흐가 단순히 불운한 삶을 살다 간 진정성 있는 예술가로 대접받는 것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천재화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흐의 붓질은 단순한 묘사의 차원을 넘어서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색면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의 회화는 이미 20세기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해바라기>나 <별이 빛나는 밤> 등의 작품은 이러한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이들 그림에 나타난 거친 붓질로 이루어진 색면들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부터 완전하게 독립시킨다면 화면에는 구체적인 사물이 없어지고 색면만 남게 될 것이다.

아마도 고흐의 그림에서 색면만 남고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이 없어진 상태를 가정해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현대 추상미술의 대가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70)의 그림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고흐가 그린 구두의 그림들 역시 다른 그림에 비해서 다소 사실적이기는 하지만 예외는 아니다. 고흐의 그림은 이미 20세기 추상미술을 선구적으로 취하고 있다.

고흐가 구두를 그린 까닭은?

빈센트 반 고흐의 1886년 작 <한 켤레의 구두>. 하이데거에 따르면 고흐의 구두 그림은 고단하고 남루하지만 소박하고 경건한 농촌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러한 미술사적인 맥락과 동떨어진 관점에서 고흐의 구두 그림에 관심을 갖는다. ‘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s, 1952)이라는 글에서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이 구두 그림을 거론한다.

그는 고흐가 구두라는 ‘존재’를 매우 충실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고흐의 그림이 구두라는 존재를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은 틀림없이 앞에서 설명한 미술사적 관점과 다소 동떨어진 것이다. 고흐의 그림이 지니는 미술사적 의미는 존재를 충실히 묘사하기보다 붓질 자체가 독립적으로 조형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흐의 구두가 존재를 충실히 묘사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미술에 관한 문외한의 주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고흐의 구두가 구두의 존재를 묘사한다고 말할 때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구두라는 사물이 아닌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있음)라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한다. 하이데거에게 구두라는 사물과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는 완전히 다른 차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구두라는 사물과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가 지닌 차이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하이데거가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도대체 구두라는 사물과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용어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구분은 의외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구두라는 사물과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는 완전히 다르다. 구두라는 사물은 그저 우리 앞에 놓여있는 하나의 사물을 뜻한다. 그저 하나의 사물로서 구두는 어느 누가 열심히 신고 다니게 되든가 혹은 그저 쇼윈도에 전시되었다가 소각장으로 처분되든가 하느냐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물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구두의 ‘존재’(있음)는 그 자체로서 그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뿐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구두의 존재란 어느 누군가가 실제로 신고 다닐 때 발생하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가령 하얀색 남성정장 구두가 멋쟁이 남성의 발에 신겨져서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할 때, 그 구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때 구두의 존재는 그저 하얀색 남성정장 구두라는 사물이 아닌 그 구두를 신고 도시를 배회한 멋쟁이 남성의 삶의 궤적을 함축하는 것이다.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고흐의 그림은 도시의 삶 속에서 은폐된 소박하고도 경건한 세계를 드러낸다.

‘존재자’와 ‘존재’는 다르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가 바로 구두 주인의 삶의 궤적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구두의 주인을 소박한 한 농부의 아내로 생각하고 이 구두의 그림이 고단하지만 소박한 농촌의 삶을 묘사한 것으로 설명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 1904~96)는 고흐가 예를 든 그림 속에 있는 구두의 주인이 파리의 도심을 활보한 고흐 자신의 구두일 것이라는 반박의 편지를 하이데거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구두 주인이 누구냐는 것과 별개로 하이데거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고흐의 그림에 있는 구두가 그저 하나의 사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두가 현실의 세계에서 겪게 되는 삶의 흔적, 즉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이 아닌 사물의 존재(있음)를 드러내는 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게 만드는 열쇠이다.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구두라는 사물과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라는 두 차원을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하이데거의 사상에 훨씬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das Seiende)와 ‘존재’(das Sein)를 구분하며, 이 구분이야말로 지금까지 모든 철학이 간과했던 가장 중요한 구분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존재자’란 쉽게 설명하자면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보면 된다. 구두의 예를 들자면 우리 눈앞에 있는 하나의 사물로서 구두가 바로 존재자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존재란 단순한 사물로서의 구두가 아닌 고흐의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차원의 존재, 즉 구두가 현실의 세계에서 만들어내는 상황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그는 세계와 인간의 존재를 다루는 철학의 핵심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지금까지의 존재론(Ontologie)이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론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존재자에 관한 이론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존재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 혹은 인간의 육체나 정신세계는 어떠한 요소들로 이루어졌느니 하는 사물, 즉 존재자를 분석하는데 맞춰졌을 뿐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러한 것들은 세계에 대한 진정한 물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존재론이란 존재자, 즉 사물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그러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대한 물음이 돼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구두라는 사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구두의 생김새는 어떠해야 하며, 구두는 어떤 기능을 위해서 만들어져 있느냐는 것이 과거의 존재론적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런 물음의 차원은 단지 구두라는 사물의 차원, 즉 존재자로서의 구두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그러나 구두의 존재는 단지 구두처럼 만든다고 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가 신고 다닐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즉, 존재자로서의 구두는 공장에서 가공됐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러한 사물이 현실적으로 있게 되는 것, 즉 존재하는 것은 누군가의 발에 밀착되어서 대지와 닿게 될 때다.

이는 그라운드를 한 번도 밟지 않은 사람을 우리가 축구선수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하고 기량을 쌓았으며 발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라운드를 한 번도 누비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축구선수가 아니다. 축구선수의 존재는 축구시합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축구시합과 더불어 존재한다.

축구선수의 존재란 축구시합이라는 현실적 상황과 맞물려 탄생한다. 축구선수라는 존재자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 즉 존재한다는 것은 축구시합이라는 현실적 상황에서만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란 축구시합에 앞서 존재하는 축구선수들, 즉 존재자의 집합이 아닌 이러한 존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상황인 것이다. 세계란 존재자들, 즉 사물들로 이뤄진 총체가 아닌 존재의 상황이다.

세계는 사물이 아닌 도구로 이뤄져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현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드 후설(Edmund Hsusserl, 1859~1938)을 스승으로 모시고 조교로 근무했으며, 후설의 대학교수직을 계승한 애제자이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대표적인 주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6)을 후설에게 헌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저서에 ‘현상학의 존재론적 시도’라는 부제를 달기도 했다.

현상학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에 앞서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인간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 두 개의 항이 만들어내는 상황, 즉 현상들이 현실세계다. 하이데거의 존재 또한 인간의 존재에 앞서 미리 존재하는 사물의 차원이 아니라 그러한 사물(즉 존재자)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만들어내는 삶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사물을 자립적인 존재자가 아닌 인간 존재와의 관계에서 숙고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것’(Vorhandenes)과 ‘손안에 있는 것’(Zuhandenes)의 구분을 통해서다. 여기서 ‘눈앞에 있는 것’이란 우리와 상관없이 우리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흐의 구두는 어쩌면 그 구두의 주인이 신든지 신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즉 분명히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 눈앞에 있는 이 자립적인 사물이 구두인 것은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 발에 신겨지는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구두가 단순히 가죽덩어리가 아닌 구두라는 사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손안에 들어가서 구두로 사용될 것이라는 사용 가능한 존재, 즉 용재(用在)임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손안에 있음’이야말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눈앞에 있는 것’)을 규정하는 범주로 일컫는데, 간단히 말해서 이 말은 곧 사물의 존재는 그것의 사용과 관련돼야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용의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므로 사물의 존재란 인간의 삶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왜 현상학적일 수밖에 없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는 독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항상 인간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세계를 이루는 사물들은 더 이상 순수한 의미에서의 존재자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실현되는 도구적 존재들이다.

이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존재자를 도구로 본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사물을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주장은 정반대의 사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다소 반복적인 설명인 듯하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구두의 사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구두라는 사물이 이미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세계는 구두와 같은 도구적 사물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사물이 구두가 되는 것, 즉 도구적 존재가 되는 것은 인간이 구두를 신고 삶을 영위할 때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도구가 된다는 것은 삶에 앞서서 미리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이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 또한 구두와 같은 사물(존재자)이 아닌 그것이 인간과 도구적 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상황, 즉 존재인 것이다. 세계란 사물의 총합이 아닌 인간이 사물과 도구적 연관을 맺으며 살아가는 상황, 즉 존재의 연속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은 곧 기술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사진은 정교한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그리스 헤파이스토스 신전.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죽음의 존재

이미 보았듯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물의 근본적인 존재양태를 도구적 존재, 즉 ‘손안에 있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이미 전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이데거는 도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즉 손안에 있는 것이란 다른 존재자를 위한 도구 혹은 다른 존재자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 다른 존재자란 결국 인간 이외에 어떤 다른 존재자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Das Sein, 있음와 구분하기 위해서 ‘현존재’(現存在, das Dasein)라고 부른다.

하이데거가 인간이라는 현존재에 부여한 가장 근본적인 특권은 ‘존재물음’(Seinsfrage)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구두는 스스로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물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으며 실제로 물음을 제기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서 이러한 물음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러한 물음을 제기할 수 없는 다른 존재자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를 드러낸다.

‘현존재’(Dasein)를 영어로 표기하면 ‘거기에 있음’(being there)이 될 것인데, 거기에 있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뜻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정지된 사물이 아닌 항상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인 존재자다. 이는 곧 인간의 존재가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da, 거기)은 공간적으로 거기에 있음이라는 특정한 장소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이데거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공간보다 특정한 상황을 뜻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인 흐름과 더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 즉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한 순간에 머물러있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중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현재의 순간을 경과해나간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선구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순간, 즉 죽음의 순간에까지도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

고대 로마시대 스토아 철학자였던 에픽테투스(Epictetus, 55~135)는 죽음이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죽음을 현재와는 상관없는 미래의 사건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항상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란 살아 있는 현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도 늘 경험하는 것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존재물음을 제기하는 것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 즉 현존재의 유한한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각성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인간에게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감(Angst)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감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행과 고통의 징표가 결코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불안감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사물과 같은 존재자로 전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존재의 본래 모습에 귀 기울이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존재의 본래 모습이란 ‘진리’를 의미할 것이며, 죽음의 각성은 인간에게 진리를 찾아 나서게 하는 견인 요소가 된다.

예술은 은폐된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다시 예술(Kunst)의 문제로 돌아오자.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가 농촌 아낙네의 삶, 즉 존재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존재의 참모습이란 진리를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진리의 참된 정의를 고대 그리스어의 어원인 ‘알레테이아’(Aletheia)에서 발견하는데, ‘알레테이아’는 말 그대로 풀자면 ‘숨어 있지 않음’(Unverborgenheit)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존재란 원래 숨어 있지 않은 것이지만 인간의 협소한 눈에는 항상 왜곡되고 감춰져서 은폐되고 만다.

하이데거는 예술이란 바로 이렇게 왜곡된 인간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고흐가 그린 시골 아낙네의 구두(샤피로가 이의를 제기하였듯이 설혹 그것이 아낙네의 구두가 아닌 고흐의 구두라도 상황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는 우리의 왜곡된 시야로 본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우리는 농촌 아낙네의 고단한 삶 속에 담긴 농촌의 소박한 삶이 지닌 존재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한다. 비록 고단하고 남루하지만 농부들은 소박한 일상 속에서 항상 발을 대지에 접하면서 경건함을 지닌 채 삶을 영위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고흐의 그림은 도시의 삶 속에서 은폐된 이러한 소박하고도 경건한 세계를 드러낸다. 예술작품이란 은폐된 삶, 즉 존재의 모습을 ‘숨어있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예술이란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미적 쾌감을 주는 것이 아닌 은폐된 존재의 본래 모습, 즉 진리를 드러내는 활동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이데거는 예술이 존재의 은폐된 모습을 드러내는 진리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기술’(Techne)과 동일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은 곧 기술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테크네’(thechne)는 오늘날의 용어로 번역하자면 ‘기술’(technic)과 ‘예술’(art)을 동시에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술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과 예술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역사의 산물이며 인위적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에서 테크네라는 말이 궁극적으로 ‘알레테이아’(탈은폐, 진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테크네라는 것은 세계, 즉 존재의 합법칙성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내는 작업의 과정이다.

오늘날 기술은 미리 주어진 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공학적 분야인 반면 예술은 자유로운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로서 서로 상반된 분야로 간주된다. 특히 근대 이후 기술은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바탕을 둔 알레테이아의 활동이라기보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닦아세우고(gestellen)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과 예술의 이분법 혹은 대립은 허구적이고 인위적인 역사적 산물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기술과 예술은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술과 예술을 포괄하는 ‘테크네’라는 말이 예술과 완전히 상반된 ‘테크닉’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오늘날의 관행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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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