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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문창극 사퇴로 우리가 잃은 것

이하경
논설주간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사퇴로 한국 민주주의는 퇴행의 순간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여론, 법치를 실현하는 정치의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그런데 일부 언론에 의해 오도(誤導)된 여론, 이를 근거로 한 야권의 무차별 공격과 여권의 정략적 편승, 청와대의 무책임이 맞물리면서 이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대통령이 법적 절차에 따라 지명한 총리 후보자 문창극의 적합성 여부는 청문회도 열기 전에 영구미제로 봉인(封印)됐다.

 문 후보자는 “일본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는 KBS의 거두절미된 보도로 파문이 일자 “한국사의 숱한 시련들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뜻”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식민지와 분단의 과정에서 맞서 싸웠거나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의 무게가 평가절하됐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문 후보자에게 ‘친일·반민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과정이다.

 이 대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팩트가 있다. 발언이 이뤄진 구체적인 상황이다. 그는 교회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신자라는 특수한 청중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신앙적 교감의 자리였다. 세속의 언어가 아닌 하나님의 언어, 신앙적 표현법을 사용했다.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의 의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강조와 비유, 생략이 이뤄졌다. 이런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서 그의 강연 동영상 풀 텍스트를 보면 KBS 보도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만일 문 후보자가 온누리교회 담장 밖을 향해서 이런 강연을 했다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쏟아낸 종교적 발언이 맥락(context)을 거세당한 채 외부로 흘러나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KBS의 최초 보도는 교회가 운영하는 CGNTV의 강연 동영상을 KBS가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한 결과물이었다.

 KBS의 11일 뉴스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문 후보자를 친일·반민족주의자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20일 밤 MBC가 교회강연 풀 동영상을 틀어준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강연의 전체적인 맥락을 알게 됐다. 문 후보자의 기독교적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가 친일·반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게 됐다. 청문회에서 소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는 합리적 이성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진실을 밝힐 기회를 주는 대신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아 치부(恥部)를 가리려 했다. 비겁한 야합이었다.

 인사 청문회는 대통령의 자의적인 인사권 행사를 막기 위한 입법부의 적극적 견제장치다. 국회는 문 후보자가 해명과 사과를 했던 위안부 발언, 제주 4·3을 ‘폭동’이라고 한 발언에 대해서도 국민을 대신해서 따져볼 수 있었다. 종교적 편향성 논란도 마찬가지다. 그가 다종교국가인 대한민국의 총리가 된다면 8할이나 되는 비기독교인들과 충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충분한 검증을 통해 다수가 판단할 기회를 가졌으면 국가적으로 유익했을 것이다.

 세간에는 문 후보자가 독불장군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칼럼과 강연에서 보수색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주필 시절, 선배인 김영희 대기자의 남북문제 칼럼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면서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내보냈다. 10여 년 전 사설 회의를 주재하면서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지지하는 사설을 쓰자고 발제한 적이 있었다. 익명성을 악용한 언어 폭력의 폐해를 막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제기되던 무렵이었다. 10여 명의 논설위원 중 딱 두 사람이 반대했다. 상위의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며칠 뒤 다시 발제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단 두 사람의 반대 때문에 주장을 접는 그의 모습을 말석의 논설위원인 나는 똑똑히 목도했다.

‘문창극 선배’처럼 소수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른 다양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게 논설위원실 책임자인 나의 목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와는 생각이 다른 점도 많지만 언론인 문창극의 방식은 언제나 민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나의 경험과 판단조차도 불완전할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래서 그가 독불장군인지 여부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청문회에서 반드시 검증받았으면 했다.

 헌법에 정해진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오도된 여론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인사청문회라는 시스템이 무력화된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다. 우리 정치는 법적 절차에 의해 지명된 소신 있는 보수주의자 문창극을 합당한 이유 없이 무대 밖으로 밀어냈다. 무엇보다도 보수·진보가 제대로 된 토론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가치에 합의할 절호의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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