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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NIE] 동학농민운동은 왜 대일 무장투쟁이 됐나

올해는 동학 농민 운동(1894)이 일어난 지 120년 되는 해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이 중심이 돼 부패한 정부에 맞서 봉건적 사회 질서를 바꿔보려 했던 개혁운동이다.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던 일본에 맞선 무장 투쟁이기도 하다. 비록 1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동학 농민 운동에서 제기한 개혁 요구가 같은 해 갑오개혁에 반영되는 등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 당시의 대일 투쟁 경험은 향후 항일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 농민 운동의 주역은 전봉준이다. 교과서와 언론이 전봉준과 그가 이끈 동학 농민 운동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전봉준(1855-1895)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현재의 전북 정읍)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한문과 한시를 배운 덕에 한때 서당 훈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워 경제적으론 평민이나 다름 없었다. 당시 농민 사이에선 평등을 강조하는 동학이 확산되고 있었다. 전봉준도 30대에 동학을 받아들여 전북 지역 동학 지도자가 됐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저항하다 곤장을 맞고 앓다가 숨졌다. 이처럼 고부 군수의 수탈이 심해지자 전봉준은 1894년 1월 고부 농민들과 봉기했다. 이게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이다. 농민군에 대한 탄압과 일본의 국권 훼손에 맞서 전봉준은 같은 해 3월과 9월에 더 큰 규모의 농민 봉기를 두 차례 더 일으켰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뒤 12월 체포돼 이듬해 사형 당했다.

정치적 라이벌, 부패 관료와 일본

1. 전봉준 생가 2. 1973년 동학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만석보유지비. 3. 전봉준이 각 마을 동학집강소에 돌려 궐기를 촉구한 사발통문. 주모자를 가려내지 못하도록 원둘레에 각자 서명했다.
고부 농민 봉기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이었다.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지방관의 부정부패는 극심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도 그랬다. 당시 농촌에선 보를 만들어 여기에 농업 용수를 가두어 놓고 썼다. 조병갑은 이미 사용 중인 보를 허물고 농민을 강제 동원해 만석보(萬石洑)를 새로 쌓은 뒤 수세(水稅)를 농민들로부터 거둬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했다. 뿐만 아니다. 교학사는 “조병갑이 대동미를 징수할 때 좋은 쌀을 징수해 조정에 상납할 때는 나쁜 쌀로 바꾸어 차액을 착복했다”고도 적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과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해 억울하게 옥살이 하던 사람들을 풀어줬다. 또 횡포를 일삼던 아전을 처벌하고, 관아의 곡식을 풀어 농민에게 나눠줬다.

 고부에서 일어난 봉기가 전국적 농민 운동으로 번진 데엔 피폐한 농촌 경제가 작용했다. 여기엔 일본 상인의 한반도 진출도 한몫했다. 리베르는 “일본 상인들은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해 조선 상인들에게 팔고 쌀을 대량으로 매입했다. 면포 수입이 증가하고 곡식 값이 폭등했다. 황해도와 함경도에선 방곡령이 내려질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다”고 썼다.

 고부 봉기 직후 정부 측이 봉기 가담자를 처벌하려 하자 전봉준은 이웃 지역 동학 지도자인 손화중(1861~1895)·김개남(1853~1895)과 함께 3월에 더 큰 봉기를 일으켰다. 제1차 농민 봉기다. 전봉준은 농민군 대장이었다. 농민군은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라성을 점령할 정도로 큰 위세를 떨쳤다. 이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 군대가 충남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본군도 자국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들어왔다.

 사태 악화를 우려한 농민군은 정부와 급히 타협해 전주화약(농민군이 전주 점령 후 정부와 맺은 조약)을 맺고 내부 개혁에 동의했다. 정부는 청·일에 철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군을 거부하고 6월에 경복궁을 무단 점령했다. 이어 동학군 진압에 적극 개입하는 동시에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한반도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했다.

 동학 농민 운동 세력은 반외세, 특히 반일 성격을 명확히 밝혔다. 1차 봉기 당시 내놓은 4대 강령에선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고 했다(금성출판사). 전주화약 당시 정부에 제시한 폐정개혁안에도 ‘왜와 통하는 자는 엄중히 징벌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전봉준은 체포 뒤에도 봉기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일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래엔은 전봉준이 체포된 뒤 그를 심문한 기록인 ‘전봉준 공초’를 싣고 있다. 여기서 전봉준은 “전주화약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냐”는 심문자의 질문에 “일본이 개화를 구실로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공격하고 임금을 놀라게 했으니, 충국애군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워 그 책임을 묻고자 함이다”라고 답했다.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과 정부군에 패한 것은 화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교학사는 독립운동가 황현(1855~1910)이 쓴 『오하기문』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 책에서 황현은 ‘우리나라 총의 사정 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본총의 사정 거리는 400∼500보도 더 되었다. (일본군은)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 쏘지 못하였다’고 적었다.

법정으로 출두하는 전봉준(왼쪽에서 세번째). 체포과정에서 다리를 다쳤다.

개혁과 항일의 씨앗을 심다

 고부 봉기(1월), 1차 봉기(3월), 2차 봉기(9월)에 이르기까지 동학 농민 운동은 줄곧 반봉건, 반외세 성격을 띄었다.

 1차 봉기 때 내건 4대 강령에서 농민군은 ‘충효를 다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고 발표했다. 전주화약 당시의 폐정 개혁안에서도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쫓아낼 것’ ‘지방관은 자기 관할 지역에서 장례를 치르지 말고 논도 거래하지 말 것’ ‘아전을 임용할 때 뇌물을 받지 말고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임용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폐정개혁안에서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천인 차별을 개선할 것’ ‘젊어서 과부가 된 여성의 재혼을 허용할 것’ ‘토지를 균등히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등을 담아 신분제 폐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각 교과서는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 “농민층이 신분제 폐지 등 전통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을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리베르)이라거나,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교도의 지도하에 민중이 가세하여 일어난 농민 운동”(교학사)이라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근대 국가 건설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리베르·미래엔)거나,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을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천재교육)는 한계도 지적한다.

 최근 언론은 전봉준을 언급하며 정부가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농민들의 외침 속엔 근본적인 염원이 담겨 있었다. ‘토지를 평균 분작하고 신분제를 폐지하라’는 그들은 더 이상 낡은 체제의 모순과 억압을 견뎌낼 수 없다고 외쳤다”(중앙일보 2014년 1월 2일 18면 ‘다시 갑오년, 한반도는 안녕한가’)

 “진정으로 위대한 영웅이란 자신의 생명과 사익을 포기하면서까지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 혁명군은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요구했는데, 삽과 괭이로 무장한 농민군을 한양의 관군이 투입되고도 진압하지 못할 만큼 조선의 군대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중앙일보 2013년 12월 24일자 11면 ‘사회 발전시키는 원동력 이타주의’)

QR코드를 찍으면 전봉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글=성시윤 기자 ,
자문=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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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