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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4년 전부터 미군의 북침설 언급 안 해"

6·25전쟁을 보는 중국의 시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선즈화(沈志華·64·사진) 중국 화둥(華東)사범대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정부나 관방매체가 3~4년 전부터 ‘한국과 미군의 북한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기존 입장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선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북한의 남침설을 공식 인정하게 될 시점은 중국과 북한이 공개적으로 분열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선 교수는 24일 서울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코리아정책연구원(원장 유호열)과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이사장 박관용)이 공동 주최하는 ‘6·25 남침의 진실’ 심포지엄에서 ‘한국전쟁 시 북한에 출병한 중국의 심층적 원인 분석’ 논문을 발표한다.

 6·25전쟁에 중국군만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분단의 아픔은 없을 것이란 아쉬움이 크다. 선 교수를 서면과 전화로 인터뷰해 중국의 참전 이유와 과정을 살펴봤다.

1951년 6월 마오쩌둥(毛澤東?오른쪽)이 6·25전쟁 상황 논의차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을 만났다. 전쟁이 길어지자 마오는 김일성에게 휴전회담에 나설 것을 제의했다. [중앙포토]
 -중국 정부는 아직도 북한의 남침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도 전쟁을 보는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3~4년간 중국 정부나 관방 언론을 보면 ‘남조선과 미군의 북한 침략으로 발발했다’고 하던 과거 주장을 되풀이하는 언급을 찾기 어렵다. 이는 분명한 변화다. 물론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하 지는 않지만 말이다. 현재 중국이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는 건 중·북 관계를 고려해서다. 중·북 관계가 공개적으로 분열할 때 중국은 북한의 남침설을 공식 인정하게 될 것이다.”

 -중국에선 6·25전쟁을 줄곧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불렀다. 한데 지난해 6·25전쟁 발발 63주년에 즈음해 중국 외교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대신 ‘조선전쟁’이란 표현을 썼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항미원조란 말에는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 중국이 전쟁에서 승리해 국제적 지위가 올라갔다는 등 중국의 자부심을 고취하겠다는 뜻이다. 조선전쟁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중국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선 교수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지 않다가 1950년 1월에 가서야 승인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스탈린이 생각을 바꾼 이유는 무언가.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려는 스탈린의 야심이 작용했다. 50년 1월은 마오쩌둥이 소련을 방문해 중·소 동맹을 협의할 때다. 이 당시 중국 뤼순(旅順)항을 소련이 사용하는 문제 등이 도마에 올랐고 소련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6·25전쟁이 터져 위기 국면이 조성되면 뤼순항을 계속 이용할 수 있고, 또 만일 김일성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우에도 한반도에 기지를 세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중국이 참전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갖게 된 것인가.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된 50년 7월 초에 벌써 파병 의사가 있었다. 중국은 7월 7일 국방회의를 열고 25만5000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조직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앞서 중국은 이미 병력을 보내 북한을 도울 뜻이 있음을 소련에 알렸다. 마오쩌둥도 7월 19일 김일성에게 중국군을 북한에 파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참전은 전쟁 발발 4개월 만인 10월에야 이뤄졌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은 이미 두 차례의 좋은 파병 기회를 놓쳤다. 첫 번째 기회는 북한이 남쪽으로 진격할 때였다. 당시 중국은 미군이 북한군 후방으로 역습하는 전술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병력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이때 한반도 해안으로 중국군 파병이 이뤄졌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한이 패퇴하기 시작할 때다. 중국은 다시 파병을 제안했다. 그러나 역시 소련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중국군이 신속하게 파견됐다면 미군은 38선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탈린은 왜 중국의 파병 제안을 승인하지 않았나.

 “중국이 파병해 수십만 군대가 북한에 진주한다면 북한은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된다. 이는 북한을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한 소련으로선 원치 않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이 참전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네 가지 이유가 얽혀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 진영의 국제 분업에 따른 책임과 의무다. 중국 공산당은 아시아 혁명을 원조하는 건 일종의 책임이자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대만 문제로 촉발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낸 것이다. 마오는 이를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행위로 보고 격분했다. 셋째는 중국 변경에 대한 위협을 고려해서다. 마오는 6·25전쟁의 불길이 중국 경내로 번지면 스탈린이 중·소 동맹을 근거로 수십 만의 소련군을 중국 동북지역으로 보낼 것이고, 이 경우 한 번 들어온 소련군을 다시 소련으로 돌려보내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넷째는 중·소 동맹을 공고히 해 중공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 때문에 마오는 참전을 결정하면서 ‘미국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 교수는 중국군이 38선까지 진격한 51년 1월에 유엔이 정전협상을 제의했지만 중국이 거절함으로써 전쟁이 53년 7월까지 지속됐고 이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착오라고 지적한다. 중국이 거절한 이유는 무언가.

 “두 가지다. 하나는 마오쩌둥의 정세판단 착오다. 마오는 미군의 반격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다른 하나는 스탈린과 김일성이 유엔의 정전협상 제의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유상철 중국전문기자·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선즈화(沈志華)=6·25전쟁이 김일성의 남침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중국 역사학자다. 냉전사학자인 부인 리단후이(李丹慧)와 90년대부터 소련 붕괴 후 공개된 6·25전쟁 관련 비밀문서를 확보해 연구했다. 98년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이라는 저서를 출간했고 이를 통해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 의 지원을 받아 6·25전쟁을 일으킨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연구는 6·25전쟁을 보는 중국의 시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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