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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굴욕 뒤 준엄한 국제정세 눈뜬 '역설의 공간'

소설가 김훈(오른쪽)씨와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지난 16일 병자호란의 현장인 남한산성을 찾았다. 2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병자호란의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다. 한국의 열한 번째 세계유산, 2010년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이 나란히 등재된 지 4년 만이다.

 WHC는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 축성법의 영향이 남아 있어 동아시아 산성 건축술 교류의 증거일 뿐 아니라 7∼19세기 유적이 골고루 발견돼 축성기술 발달 단계를 잘 보여준다”고 등재 이유를 밝혔다. 인류가 후대에 보존·전수할 만한 세계적 유산으로서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다.

 이같은 ‘외부’의 평가와 함께 우리에겐 잊어선 안 되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78년 전 조선 왕조가 청의 침략에 무참하게 짓밟힌 전쟁, 병자호란(1636년)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요동치던 17세기 동북아 정세의 산물이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당시 중국 대륙은 명·청 왕조의 교체기였다. 병자호란에 앞서 1592년(임진왜란)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조선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文)을 숭상했던 조선은 그야말로 강대국 사이에 낀 신세였다.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둔 16일 오후, 소설가 김훈(66)과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52) 교수와 함께 남한산성을 찾았다. 둘 다 이곳에 특별한 인연이 있는 전문가들이다.

 김훈은 인조(仁祖) 정권이 남한산성 안에 갇혀 지낸 46일을 조명한 소설 『남한산성』(학고재·2007년)으로 쓰라린 과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 교수는 지난해 말 펴낸 『역사평설 병자호란』(푸른역사)을 통해 중국의 G2 부상, 그에 맞선 미국·일본의 연합 사이에서 처신이 어려운 21세기 한국이 병자호란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했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성 안은 한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쏟아낸 남한산성의 역사적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요동치던 17세기 동북아 정세의 산물

인조가 청에 항복하러 내려갈 때 이용했던 산성의 서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훈(이하 김)=소설을 쓰면서 늘 궁금했다. 조선 조정이 청의 위협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토록 대비가 부족했나.

 한명기(이하 한)=정묘호란(1627년)도 그렇지만 병자호란 역시 출발은 임진왜란이다. 명의 개입으로 임진왜란이 끝나자 ‘신하의 나라’ 조선은 명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왜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명·청(후금)간의 갈등이 격화되자 청과 맞서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광해군은 군사적으로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려 했다. 하지만 전시성 사업을 벌이다 국가 재정을 파탄 내고 민심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의 아들인 조카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지만 전쟁에 대비할 겨를이 없었다.

 김=그렇더라도 조선군은 너무나 허약했다.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일주일도 안 돼 남한산성 지척까지 쳐내려 온다.

 한=당시 청군의 병력은 무려 14만 명이었다. 조선의 정예병력은 2만 명에 불과했다. 조선은 작전에서도 실패했다. 청의 주 침투로에서 10∼15㎞ 떨어진 산성들에 집결해 청을 막는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을 폈으나 청은 산성을 우회해 신속하게 남하했다. 경보 시스템도 엉망이었다. 지금의 황해도 부근인 황주를 지키던 김자점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넌다는 내용으로 의주에서 올린 봉화를 접하고도 이를 중앙 조정에 전달조차 하지 않았다.

 -준비부족의 대가는 참혹했다.

 한=인조를 남한산성으로 몰아넣은 청은 지금의 잠실벌판에 진을 치고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광분했다. 최대 50만 명을 끌고 간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한겨울에 음식이나 난방도 없이 집단수용됐다. 그러다 보니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조선인의 그런 고통을 떠올리면 참담할 뿐이다. 인조는 정권을 잡았으면 그에 걸맞은 엄중한 책임의식을 발휘했어야 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산성에 갇혀서도 전쟁을 해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와 화친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싸웠다.

 김=인조 정권은 갈수록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차츰 현실감각을 잃었던 것 같다. 궁지에 몰릴 때 사람의 언어는 격렬해지고 강퍅해지기 마련이다.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 안이 그랬다. 나중에는 언어와 현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런 여력이 없는데도 나가서 싸우자고 외쳤으니 말이다. 자기들의 언어에 스스로 마취됐던 것 같다. 허깨비 같은 말들이 다른 허깨비 말들과 뒤얽혀 말과 말이 싸우는 그런 상황이었다.

조선 조정 ‘척화 vs 주화’ 명분 다툼

 한=척화파나 주화파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척화파가 고수했던 가치는 명에 대한 사대(事大)였다. 반면 주화파인 최명길 같은 이는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고 봤다. 정묘호란 때 형제관계를 맺는 것으로 물러갔던 청이 왜 군신관계를 요구하는지 따져 묻고 그 사이 시간을 벌자고 했다. 그런 최명길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척화파보다 더 강경했다. 인조가 척화파의 주장에 따라 강화도에 들어가 항전하려고 하자 어차피 싸울 거면 차라리 압록강변에 가서 일전을 벌이자고 했다.

 -전쟁을 피할 방법은 없었을까.

 한=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가장 뜨거운 부분이다. 나는 최명길의 주장대로 압록강변에 나가 청과 싸웠다면 포로가 수십만 명까지 발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본다. 병자호란은 싸움으로 치면 센 상대에게 초반에 한 방 맞고 끝낼 수도 있었을 싸움을 질질 끌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다음 항복한 거다. 하지만 누가 자신 있게 역사의 ‘만약’을 얘기할 수 있겠나. 가령 G2로 부상한 중국과 그에 맞서는 미국·일본 사이에서 한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김=병자호란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짧은 끈에 목이 묶인 인간 군상을 연상시킨다. 명을 섬겨야 한다는 이념의 끈 말이다. 그들은 목숨 걸고 청과 싸우려 했다. 나는 인간은 어떻게 하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흥정과 타협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원칙과 자존 만으로 살 수 없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개인의 도덕과 국가의 도덕은 분명히 다르다. 나라가 망하고 난 뒤 망한 과정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명분에 합당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이 있을까.

인조, 치욕 무릅쓰고 사는 길 택한 것

 -인조는 어떤 인물이었나. 『역사평설 병자호란』에서는 우유부단하게 그려진 반면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고뇌하는 군주의 이미지다.

 김=인조가 항복하기로 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김상헌 등 척화파는 아마 조선 성리학이 길러낸 최고의 선비들일 것이다. 가장 정의롭고 순수한 성리학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눈앞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장님들이었다. 반면 주화파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삶의 방편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노예가 되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가치관에 비춰 인간으로 취할 수 없는 개·돼지의 길을 가자는 거였다. 나는 두 양극단의 어느 쪽도 인조가 선택하지 않았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자존과 영광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치욕과 굴욕도 그 안에 들어와 있다. 자존과 영광만으로 이뤄진 역사를 얘기하자는 것은 몰역사적인 시각이다. 인조의 선택은 주화의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이 갈 수 있었던 오직 하나의 길을 간 거다. 치욕을 감당하고 사는 길 말이다. 나는 그게 임금의 길로써 정당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온 백성의 씨가 마르더라도 싸우자,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한=인조가 광해군을 쫓아내고 반정(反正)을 일으킨 데는 나름 명분이 있었다.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를 폐한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악을 저질렀다고 공격했다. 하지만 인조는 왕이 되고 나자 정권을 지키기에 바빴다. 명과의 관계에서 갈팡질팡했고, 반정 성공의 논공행상을 잘못해 결국 이괄의 난을 불렀다. 이괄의 난 이후 인조 정권은 사실상 정치력을 상실했다고 본다. 왕으로서는 박하게 평할 수 밖에 없다.

조선인 디아스포라 출발점이기도

 -병자호란 은 단순히 실패한 전쟁이었나.

 한=전쟁에 패하자 조선은 일본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또 대립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국제정세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가령 청에 볼모로 잡혀간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서양의 앞선 문물을 경험했다. 병자호란은 조선인 디아스포라(흩어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청에 끌려간 수십만 명 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런 점에서 남한산성은 복합적인 공간이다. 세계유산 등재의 기쁨 안에는 이런 역사적 의미도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전쟁 이후 조선은 심각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겪는다. 인조는 친청(親淸)으로 돌아섰지만 효종은 북벌론을 폈고, 18세기에는 반대로 청을 배우자는 북학파가 등장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자기모순과 갈등 속에 유지된 왕조였다. 자존과 사대, 정통과 이단,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숱한 자기분열을 겪었다. 남한산성은 그 진원지다.

 -병자호란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한=요즘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사안은 남북관계라고 본다. 남북관계에서 실마리를 풀어나갈 때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우리의 자율성이 좀 확대되지 않을까. 남북관계가 꼬이면 외세의 간섭은 심해질 수 밖에 없다.

 김=중학교 3학년 때 여기로 수학여행을 왔다. 산성 복원 전이어서 폐허 같았다. 당시 국사 선생님은 400년 전 역사를 들려줬다. 끔찍한 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의 야만성이 무서웠다. 그런 기억이 맺혀 훗날 소설을 쓴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선생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한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지 않나. 

남한산성=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가 1972년 채택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후세에 전수해야 할 탁월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이 세계유산이다. 세계유산은 크게 자연유산·문화유산·복합유산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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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