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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 게 미덕? 그러다 폭발 … 수다 떨며 감정 표출하라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는 ‘화병(火病)’을 앓았다. “심증(화병)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마음이 답답하고 목이 막혀 국사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왕실의 법도가 우선시됐던 그 시대 왕들에게 화병은 숙명과도 같았다. 중종·광해군·숙종·경종은 화병으로 인한 종기를 앓기도 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 간의 불화, 직장 상사와의 갈등, 실업·퇴직 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스트레스가 끊이질 않는다. 이를 속으로만 삭이다가 생기는 병이 화병이다. 화병은 한의학의 ‘화(火)’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중앙일보는 한의학의 우수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기획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두 번째 주제는 ‘화병’이다.

한국인 특유 질환, 중년 남성의 화병 급증

주부 박경희(가명·54·여)씨는 한두 달 전부터 가슴에 무언가 막혀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숨쉬는 게 힘들 정도였다. 체한 것 같아 소화제를 먹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열이 치솟는 느낌도 들었다. 밤에는 잠이 안 와 뜬눈으로 지새웠고, 낮에는 입맛이 없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한 달 새 몸무게가 5kg 빠졌다. 집에 혼자 있을 땐 과거에 억울하고 분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람이 미워지고 ‘살기 싫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몸에 이상이 있나 싶어 내과를 찾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지인의 권유로 한방병원을 찾은 박씨는 ‘화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화병은 한마디로 화를 참아 생기는 병이다. 울화병(鬱火病)의 준말이다. 분노·억울함이 표출되지 못하고 마음에 쌓였다가 불(火)의 증상으로 폭발하는 질환이다.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에 따르면 국내 화병 유병률은 4.2~13.3%로 추정된다.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 정선용 교수는 “한의학적 질병으로 분류되는 화병은 1995년 미국정신학회가 ‘한국 문화와 관련된 분노증후군’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우리 민족 특유의 질환”이라며 “유교적 전통과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로부터 화병은 중년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남성 환자가 많이 증가하고 있다.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 교수는 “예전에는 화병 환자 중 남성 비율이 10%에 불과했지만 요즘엔 30% 수준으로 늘었다”며 “여성은 가족 간 갈등이 화병의 주요 원인인 반면, 남성은 직장 내 갈등이나 실직,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남성은 분노를 참지 않고 화를 분출해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급성 화병 증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가슴 답답·얼굴 화끈

화병은 우울증·분노조절장애와 같은 다른 정신질환과 혼동된다. 하지만 신체 증상이 주가 된다는 점에서 다른 질환과 큰 차이가 있다. 동국대분당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근우 교수는 “화(火)는 위로 올라가는 특성이 있어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입과 목이 바짝 마르고 눈이 충혈된다”고 말했다. 건강한 사람은 가슴이 시원하고 배가 따뜻한 반면, 화병 환자는 가슴에 열이 나고 배가 차가운 이유다. 김 교수는 “심장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심장내과를 찾거나 목의 통증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가는 경우가 많다”며 “화병을 진단받기까지 여러 진료과를 전전하는 환자가 상당수”라고 말했다.

우울증과 화병이 겹쳐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김종우 교수는 “우울증 환자의 50%는 화병을 함께 겪고 있다”며 “우울증 치료가 효과적이지 않은 환자는 화병이 아닌지 확인하고 치료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화병이 다른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혈압이다. 김근우 교수는 “화병이 만성화되면 자율신경계가 제대로 조절되지 않아 혈압이 올라간다”며 “심하면 중풍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가 중풍 환자의 선행질환을 조사한 결과, 고혈압 다음으로 화병이 꼽혔다. 중풍 환자의 3분의 1은 과거 화병을 앓았다는 보고가 있다. 정선용 교수는 “분노를 참다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반복될 경우 부정맥과 같은 심장질환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산소 운동, 명상으로 스트레스 다스려야

한방의 화병 치료는 뭉친 기운을 풀고, 올라간 화를 아래로 내린다. 방법은 약물·침·심리요법으로 구분된다.

약물 처방은 열·답답한 증상으로 구분된다. 김근우 교수는 “열에는 ‘청심연자음’, 답답함에는 ‘분심기음’ 계열의 약물을 처방한다”고 설명했다. 향부자·진피·목통 등 기운을 순환시키는 한약재를 주로 사용한다. 침으로는 가슴에 뭉친 기운을 풀어준다. 가슴 중앙에 위치한 ‘전중’이라는 혈자리를 눌러 심한 통증을 호소하면 이곳에 침을 놓는다.

최근에는 명상이 화병의 특효약으로 꼽힌다. ‘마음 챙김’ 명상이 활용된다. 호흡에 집중하면서 신체를 이완하고 억눌린 자신의 본 모습을 바라보며 감각을 일깨운다. 김종우 교수는 “명상은 몸 전체 근육을 이완하고 뇌에 산소를 공급해 준다”며 “화의 기운을 아래로 내려 신체적 증상이 가라앉고 화병이 재발하는 것을 예방한다”고 말했다.

화병을 예방하려면 무조건 참는 습관은 피해야 한다. 김근우 교수는 “스트레스를 참고 덮어두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잠복했다가 나중에 심신의 문제로 나타난다”며 “수다·대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상당히 준다”고 조언했다. 특히 스트레스에 민감한 소음인, 내성적인 성격은 유산소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통해 평소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게 좋다.

 오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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