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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국에 필요한 '망각 없는' 전진

[일러스트=강일구]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지난 월드컵 때만큼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러 모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빨간색 티셔츠에 새겨진 ‘코리아 파이팅’ 문구는 선명했다. 그래도 일부 팬들은 전날 밤 10시 좋은 자리에서 응원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으로 야영하러 모여들었다. 러시아팀과의 승부는 아쉽게도 1대 1로 끝났다.

 수요일 아침 붉은악마 인파의 외침이 가까이 들리는 그곳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색 리본 수천 개가 신선한 아침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전날 밤 텔레비전 뉴스는 세월호 승무원 재판 소식과 다음날 한-러전의 전망·각오 사이를 오갔다. 뉴스 앵커의 들뜸 속에는 슬픔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열광적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런 분위기의 배경은 뭘까. 이번 월드컵 한국 대표팀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올해에는 온몸을 내던지는 것 같은 축제 분위기를 삼가야 한다는 자제심 때문일까. 세월호의 비극 때문에 호된 자책이 계속돼야 하는 걸까. 2002년 한국 민족주의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은 재연되지 않았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한껏 뻗어 나가던 붉은 물결의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국가대표들 자신이 러시아와 싸워 꼭 이겨야 한다는 다짐을 차마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기면 승리를 자축해야 하니까. 승리는 어쩌면 아직 나라를 뒤덮고 있는 슬픈 어둠과 어울리지 않았다. 승리의 환희는 어색한 데다 심지어는 이기적인 일이었다. 또한 지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비겼는지 모른다.

 2개월 전에 발생한 세월호의 비극으로 한국인은 자신감을 잃었다. 해경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정부에 대한 믿음도 사라졌다.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세계는 한국의 이런 집단 우울증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외부에서 보면 현 상황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렇게 묻는다. ‘한국은 자신감과 야망으로 넘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한국은 언제까지 지금처럼 방어적인 자세로 웅크리고 있을 것인가’ ‘한국은 지금의 마비 상태, 믿기 힘든 죄책감을 언제 극복할 것인가’.

 세월호 승무원에서 청와대까지 실수가 많았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제 잘못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과정이 시작됐다. 세모그룹 창업주 유병언의 뒤를 쫓고 있다. 또한 한국 정부는 대대적인 국가개조에 착수했다. 개조의 규모는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가 추구한 변화를 방불케 할 것이다.

 세월호 유형의 참사는 이따금씩 한국 시스템의 약점을 드러내곤 한다. 한국인들은 실수로부터 배우는 ‘묘한(uncanny)’ 능력을 항상 입증해왔다. 예를 들자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만든 1997년 유동성 위기는 대한민국 경영과 경제 운영의 주요 문제를 노출했다. 한국은 비즈니스 관행의 안정화·재구조화·현대화를 위해 공세적으로 조정에 착수했다. 그 결과 한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타격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세계 주요 경제 강국이 됐다.

 1970~2000년 기간에는 한국의 항공 안전도가 주요국 중에서 세계 최악이었다. 16대의 승객기·화물기가 사라졌고 승객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한국은 훈련과 법규의 강화에 나섰다. 원어민 영어 사용 조종사를 채용했다. 사고를 유발한 잘못된 결정의 원인이 됐을지도 모르는 언어적·문화적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런 전례를 봤을 때 세월호 비극을 겪은 한국이 안전과 위기대응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에 성공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장기적으로 보다 안전한 나라가 될 것이다. 학생들에게 들이닥친 끔찍한 운명을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얼굴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노란 리본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시청 앞에서, 청계천 물길을 따라 사무 빌딩 앞에서 조용히 나부끼고 있는 수천 개 노란 리본은 ‘안전한 나라 만들기’라는 결의를 한국인들에게 영원히 상기시킬 것이다. 마음속 리본을 끌어내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이제 한국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번 월드컵은 ‘코리아 파이팅’으로 기분을 북돋울 좋은 기회다. 세계는 자신감과 야망으로 넘치는 한국을 다시 보고 싶다. 전과 달리 새로운 한국은 남을 보다 많이 생각하며, 남의 기분을 보다 세세히 살피는 그런 나라였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 대한민국팀이 싸울 때 국민은 2002년의 애국주의적 광희(狂喜)를 복원해야 한다. 저녁에는 거대한 태극기가 붉은악마의 손 위로 흘러나가는 가운데 폭죽이 하늘을 수놓아야 한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뻐해야 한다.

 태극전사들이 노란 리본을 손목에 매는 것은 어떨까. 이번 월드컵의 승전보를 아쉽게 생을 마감한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전에 바치기 위해서 말이다. 이젠 죄책감을 털어낸 환호가 절실하다. 그래야만 단원고 아이들을 절대 잊지 않는 가운데 앞으로 전진할 큰 힘이 생기니까.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일러스트=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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