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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선배가 시키는 대로만 그렸으면 지금의 이현세는 없다

1980년대, ‘까치’ 오혜성은 당대의 아이콘이었다. 교실 한 켠에선 그의 열혈 소년소녀 팬들이 우수에 젖은 그의 얼굴을 무수히 그려댔다.



이현세가 그린 이현세
"만화는 내 운명"
인민군 삼촌 때문에 어린 시절 빨갱이 집안 낙인
색약으로 미대 원서 못 쓰니 만화 그릴 수밖에
평생 시달린 학력 컴플렉스 … 털어 놓으니 별 것 아니더라

오혜성, 그리고 그의 연인 엄지가 등장하는 『공포의 외인구단』(1983년 첫 출간)으로 단숨에 한국만화의 대명사로 등극한 이가 바로 만화가 이현세(60)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해 『지옥의 링』『제왕』 등 수많은 스포츠 만화로 80~90년대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 만화책 두어 권 그리면 아파트 한채 살 돈이 나온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이현세 특유의 드라마틱한 연출력은 스포츠와 최상의 궁합이었다.



왼쪽부터 이현세·둘째 딸 엄지·아내 안영순·큰 딸 주명·막내 아들 종수. [사진 킹콩인러브]
이현세(60)



1954년 경남 포항 흥해 삼바리 출생

1973년 경주고등학교 졸업

1978년 만화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

2001년~현재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주요 작품



『까치의 5계절』 『국경의 갈가마귀』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 『블루엔젤』

『남벌』 『천국의 신화』 『버디 버디』등







사는 곳 : 강남구 일원동

근무하는 곳(화실) : 강남구 개포동

운동하는 곳 : 양재천

장보는 곳 : 동네 슈퍼마켓

자주 가는 식당 : 도곡동 우각



가족

부인 : 안영순(53)

자녀 : 1남 2녀, 주명(34)·엄지(31)·종수(27)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만화가 이현세가 직접 드로잉하고 색칠한 자화상. 두 개의 흑백 캐리커처는 만화『공포의 외인
구단 Stylish Remake』(2009)를 발표한 박찬섭 작가가 江南通新을 위해 그려온 작품.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실은 출생의 비밀이 있다. 할머니가 집안 대를 잇게 하려고 나를 큰 삼촌의 양자로 입양시킨 걸 스무 살 때 처음 알았다. 그 때까지 나는 친아버지를 막내 삼촌으로 여기고 살았다. 또 한 가지, 6·25 전쟁 때 인민군에 가담한 둘째 삼촌 때문에 빨갱이 집안이 됐다. 할머니는 내게 오로지 살아남으라는 교육만 시켰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생존만이 절대명제였다. 집안 사람조차 가려서 만났으니까. 물론 여느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잘 어울렸지만 가슴 속엔 늘 불신의 정서가 깔려 있었다. 돌이켜보면 난 애초에 정상적으로 자라기 힘든 사람이다. 직업을 잘 선택했다.”






-어떻게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나.



“홍익대 미대와 서라벌 예대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했지만 원서 쓰기 전 색약 판정을 받았다. 연좌제에 묶여 마땅히 갈 곳이 없는데 색약이니 미대조차 갈 수 없었다. 신은 이렇게 내게 만화를 그리도록 계시를 내렸다. 1974년 봄부터 서울 모래내에 자리한 나하나 선생 화실에 입문해 순정만화 데생을 배웠다.”



-당시 자기 스토리를 그리는 만화가가 드물었던 걸로 안다. 어떻게 글과 그림을 같이 하게 됐나.



“만화가는 완벽하게 두 부류다. 문하생에게 글과 그림을 같이 가르치거나 그림만 가르치거나. 나는 그림만 가르쳐주는 나하나·이정민·하영조 작가 화실에 있었다. 그림 잘 그리는 선배는 많았지만 스토리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스토리는 스토리 작가가 쓰는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 선배들 모두 자작할 능력을 키우지 못해 실패했다. 다행인지, 나는 애초에 극화에 관심이 있어 그 화실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그 화실 작가나 선배 영향을 덜 받은 거다. 그러다 75년 지인의 소개로 ‘새소년’ 잡지사에서 일하게 됐다. 당시 새소년은 미국·일본 만화를 번안해 부록으로 내놨다. 나는 ‘배트맨’ ‘스파이더맨’,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와 시라토 산페이 등의 만화를 필사하며 습작했다. 그냥 필사만 했다면 오늘의 이현세는 없었을 거다. 함께 일하던 편집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떤 만화가 왜 재미있는지 분석을 했다. 나 역시 작가로서의 고민을 시작했다. 잡지사 번안 작가는 당시 만화계 주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쉽진 않았다. 오히려 자유로운 아웃사이더라 어느 한 패턴이나 장르에 묻히지 않을 수 있어 결국 내게 큰 도움이 됐다. 80년대 초부터 내 스토리를 썼다. 내가 『까치의 5계절』을 들고 나왔을 때, 허영만이나 한희작 선배는 날 보고 ‘쟤 누구야’라며 다들 궁금해했다.”



-위기도 있었는데.



“97년에 『천국의 신화』가 음란물 판정을 받았다. 그때 각각 초·중·고에 다니고 있던 우리 애들은 학교 가면 다들 ‘너희 아버지, 야한 것 그리다가 잡혀갔다며’라고 놀림을 받았다. 만약 그때 내가 그냥 벌금 내고 항복했으면 다 무너졌을 거다. 하지만 난 예술가로서 정당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단돈 3만원도 못 내겠다고 버틴 거다. 그리고…, 위기라기보다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바로 학력위조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건 평생 날 따라다닌 핸디캡이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된 후 언론과 한 첫 인터뷰에서 대학을 중퇴했다고 말해버렸다. 이 말 한마디가 25년을 따라다녔다. 2007년 『버디』를 내면서 서문에서 스스로 학력 문제를 공개했다. 큰 딸이 ‘혹시나 언론이 이걸 알고 터뜨리면 어쩌느냐’고 걱정했을 때 난 ‘아버지가 부끄러운 짓을 했으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용기를 냈고, 그 순간 핸드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만 나온 게 핸디캡이 아니라, 그걸 감추려 한 것이 핸디캡이었다. 스스로 학력을 공개하자마자 신정아 사건이 터졌다. 그때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어휴~.”



-만화가 하겠다는 자녀는 없었나.



“없다. 큰딸 주명(34)이는 광고회사 이벤트 담당 기획자, 작은딸 엄지(31)는 공연 무대 디자이너, 막내 아들 종수(27)는 광고회사 디자이너다. 어릴 때부터 ‘아빠처럼 밤샘하면서 살 자신 없어서 만화가는 못하겠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다행이라든지, 서운하다든지 하는 느낌은 없었다. 다 자기 길을 가는 거니까. 애들이 도움을 청할 때만 멘토 역할을 해준다. 아빠지만 아주 객관적으로 조언한다. 그래야 애들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다시 물어온다.”



-둘째딸 이름이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 이름(엄지)과 똑같은데.



“작품 성공 후 딸이 태어나 만화 여주인공 이름을 붙였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



“아내는 만화가 친구 안춘회의 여동생이자 애니메이터 출신이다. 안춘회 집에 놀러갔다가 만났다. 아내는 1979년 근거 없는 확신 하나로 무명의 신인 작가이던 나와 결혼했다. 그때 난 그야말로 땡전 한 닢 없는 빈털터리였다. 결혼자금 마련하려고 출판사에서 50만원 가불하고, 친구들과 50만원짜리 계를 만들어서 내가 첫번째로 곗돈 탔다. 그렇게 100만원 만들어서 광명 철산리에 전세로 방 한 칸을 마련했다. 신혼살림은 말 그대로 젓가락 두 짝과 숟가락 두 벌이 전부였다.”



이현세가 그린 일러스트. 젊은 시절 술 취해 쓰러지자 아내가 원고부터 챙겼던 일화를 재밌게 묘사했다.
-아내도 그 분야 사람인 셈인데, 조언도 좀 해주나.



“아내는 결혼 후 내조에 전념했다. 한번도 내 만화를 평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봤는지 안 봤는지, 입 자체를 안 뗀다. 나도 안 물어보고. 일종의 불간섭이다. 아내가 같이 글 쓰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토론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내 아내는 ‘남편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을 쓰고 멋진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고 전적으로 믿는다. 그래서인지 애들 역시 내 작품에 대해 절대로 품평하지 않는다. 재미있느니, 없느니란 말을 아예 꺼내지 않는다. 밖에서 독자·평론가에게 충분히 비판받는데 집에서까지 욕 먹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난 글 쓰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도 반대한다. 어느 작가 결혼식에서 이런 주례사를 한 적이 있다. 집에선 무조건 칭찬해주라고. 작가에겐 가족의 지적에도 앙금이 남게 마련이다.”



-암 투병 중인 걸로 아는데.



“몸이 종합병동이다. 위암에다 당뇨·심근경색 증상도 조금 있다. 2012년 말 위암 수술 후 술을 끊고 병원에서 검진을 자주 받으며 몸을 추스리고 있다. 술을 안 먹으니 책을 많이 읽고 충분히 자는 건 좋다. 그런데 큰딸이 ‘거세된 호랑이 보는 것 같다’며 슬퍼하더라. 내년부터는 와인이라도 조금씩 마실 생각이다. 지금 술자리 예약 접수 받고 있는데 첫 술자리는 무조건 두 딸과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다시 만화 얘기를 좀 해보자. 브라질 월드컵이 코 앞이다. 스포츠만화를 그렇게 많이 그렸으면서 축구만화는 왜 딱 한 번만 했나 궁금하다.



“축구만화는 1987년 발표한 『억세게 재수없는 녀석들』이 유일하다.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등이 너무 무거운 분위기여서 가벼운 걸 한 번 해볼 생각에 뛰어들었다. 까치와 두산이가 고교 최고의 스트라이커와 골키퍼인데, 이상하게 경기를 하면 지는 이야기다. 골대 50번을 맞고 튀어나온다든지, 결정적일 때 축구화가 찢어져 빗맞는다는지 하는 코믹물이었다. 축구 관련 만화는 이 작품 하나뿐이지만 그 동안 야구·권투·여자배구·아이스하키·씨름·골프 등 여러 스포츠를 만화화했다. 80년대만 해도 스포츠라는 소재가 정부 검열에서 가장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축구만화는 많이 안 그렸느냐고. 다 이유가 있다. 축구만화는 사람을 많이 그려야 한다. 공 따라 사람이 움직이니까. 그만큼 그리기 힘들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보단 축구에 인생 이야기를 집어넣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반면 야구는 공 하나 던질 때, 칠 때, 틈새의 시간이 존재하니 갈등 요소를 집어넣을 수 있다. 한마디로 축구는 원초적인 스포츠, 야구는 작전이 좀더 많이 필요한 스포츠랄까. 그런데 어느 순간 야구만화도 그리기 싫어졌다. 야구만화는 20권쯤 되는 분량 안에서 똑같은 유니폼·글러브·구장 그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지겹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린 종목은 다 직접 해봤나. 혹시 축구를 해봤다면 주로 맡았던 포지션은 뭔가.



“나는 몸치다. 기본적으로 뛰는 걸 싫어한다. 축구 할 땐 매의 눈으로 골키퍼를 봤다. 골키퍼 잘 한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쟤가 어디로 차겠다’는 게 감지가 되더라. 골키퍼는 역시 눈썰미다. 젊어서는 야구를 좋아했는데 어른이 되서는 야구보다 축구 보는 걸 더 즐긴다. 야구는 작전이 너무 많아서 이게 스포츠인지 두뇌 게임인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다. 손을 안 쓰고 발로 찬다는 것도 축구의 매력이다. 골프 빼고는 가장 승부가 불확실한 스포츠다.”



-매의 눈으로 브라질 월드컵 결과도 예측할 수 있을까.



“한국 팀이 16강엔 오르지 않을까 예상한다. 홍명보 감독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보다 운이 더 좋았던 사람이다. 홍명보 리더십도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왠지 저 사람은 자신 있어보여’ 하는 느낌. 좋은 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니 기대해볼만 하다.”



-마지막으로, 어떤 신조로 살아왔나.



“진수무미(眞水無味)란 표현을 아는가. 이 문구를 액자로 만들어 집 현관에 오랫동안 걸어놓기도 했다. 이 말은 ‘진짜 물은 맛이 없다’, 즉 순수한 사람이 되자는 의미다. 난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약속은 기어코 지킬 뿐더러 내 색깔도 분명히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나한테 속아서 다치지 않기 때문이다.”



글=장상용 기자 그림=이현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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