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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의리는 지켰는데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투표는 으리’라고 적힌 현수막을 본 건 몇 주 전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였다. 쉽게 짐작하는 대로 ‘으리’는 ‘의리(義理)’의 변형된 표기이자 배우 김보성 덕에 한창 유행어로 확산된 말이다. ‘투표는’과 ‘으리’ 사이에는 작은 글씨로 ‘청춘에 대한’이라고 적혀 있다. 비록 청춘이라고 우길 처지는 아니지만 의리 운운하며 투표를 호소하는 표현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오해를 막기 위해 밝혀 두자면 이 현수막은 내건 주체가 적혀 있지 않았다. 이번 6·4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선 ‘으리’나 ‘의리’가 여야 고루 선거운동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뽑으리! 찍으리! 넣으리! 6월 4일 대한민국 의리 지키는 날!’은 새누리당의 투표 독려 슬로건 공모전 대상작이다. ‘투표는 으리’라는 문구를 새정치민주연합을 상징하는 파란색 글씨로 써서 들고 다닌 선거운동원들도 있었다.



 물론 투표는 의리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다. 헌법 제24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나와 있다. 아무튼 의리로든 권리로든 어제 아침 투표장을 찾기 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우편으로 보내 온 각 후보와 정당의 공보물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서울에 사는 유권자이니 투표소에 들어서면 먼저 시장·구청장·교육감을 뽑는 투표용지를 받게 될 터다. 여기까진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반면 시의원·구의원에 이르면 좀 난감하다. 집 앞 골목에 걸린 선거 벽보에 얼굴과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건만 여전히 눈에 설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입사원서에 적힌 몇 줄의 경력과 사진과 이름만으로 최종 합격자를 낙점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시의원·구의원 후보 중에는 현직인 이도 있다. 지난 지방선거 때 투표용지에서라도 분명 이름을 봤을 텐데 미안하고 부끄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다는 ‘보통 선거’의 원칙이 시행되니 망정이지, 만약 ‘유권자 자격 검증시험’ 같은 게 있었다면 불합격 판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기초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배제하려던 정치권의 논의를 떠올리면 더 민망해진다.



 이게 어느 게으른 유권자 한 사람만의 경우라면 다행일 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제 만난 이 중에는 ‘후보자들을 잘 몰라서’ 투표를 안 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 기간은 2주가 채 되지 않는다. 이 짧은 기간에도 몇몇 후보를 알리는 문자나 녹음 메시지를 수차례 받긴 했다. 대개 뉴스로도 익히 접할 수 있는 후보들이다. 하지만 구의원·시의원 후보들은 사정이 다르다. 대선 이후 치러지는 선거는 여야에 대한 중간평가처럼 해석되곤 한다. 어떤 해석이 나오든 지방선거로 뽑힌 이들이 지역과 동네를 책임질 일꾼이 되는 건 변함없다. 투표라는 의리는 지켰으되 과연 유권자로서 권리를 제대로 행사했는지는 못내 찜찜하다.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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