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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봐도 톡톡 튀는 수십 년 전 아이디어

19세기 오페라 가수였던 리나 카발리에의 얼굴을 모티브로 한 접시들.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렸던‘피에로 포르나제티 탄생 100주년’ 기념전의 도록에 수록된 사진이다.
“방향을 잃거나 게으를 때, 혹은 정말 모르겠거나 머릿속이 백지화될 때 나에게는 포르나제티라는 비밀 주문이 있다. 포르나제티의 모든 오브젝트들은, 예를 들면 내 주방에 있는 눈이 달린 차 주전자는 마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문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는 열린 문과 같다. 선반 위에 20년 넘게 이것을 갖고 있지만 이 차 주전자의 마법은 여전히 효과적이다.”

세계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필립 스탁이 이토록 찬사를 보냈던 인물은 누구일까. 주인공은 바로 피에로 포르나제티(Piero Fornasetti·1913~88·왼쪽 사진). 20세기 최고 장식 예술가로 꼽히는 이탈리아의 아티스트다.

화가이자 조각가, 디자이너, 판화가 등 다양한 타이틀로 불렸던 포르나제티는 생전 무려 1만3000여 개 작품을 만들어냈다. 컵과 접시, 우산, 램프, 가구 등 수많은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 그의 이름으로 제작됐다. 특히 드로잉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성으로 평가받았다.

국내에서도 이를 직접 감상해 볼 기회가 생겼다. 10꼬르소꼬모 서울이 오픈 6주년을 맞아 마련한 포르나제티 탄생 100주년 회고전(5월 9일~6월 15일)을 통해서다. 8일 열린 오프닝 행사에는 그의 아들 바나바 포르나제티(Barnaba Fornasetti·64·오른쪽 사진)도 참석했다. 스스로도 재능 있는 디자이너인 그는 선대가 남긴 디자인 유산을 이어받아 ‘포르나제티’라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인물. 그래서 그와 마주한 자리에선 물어야 할 것이 분명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구식으로 여겨지지 않는 디자인의 힘이 무엇인지, 또 다른 예술가에게까지 영감을 줄 수 있는 그 ‘마법’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이다.

1 1951년 처음 선보인 캐비닛 ‘Architettura Trumeau’. 지오 폰티가 만들었던 기존 디자인을 포르나제티가 재해석했다. 2 ‘Architettura’ 시리즈 중 하나인 작은 캐비닛. 3~5 여인의 얼굴을 세 개로 나뉜 조립식 테이블. 합치면 완성된 모습이 나타난다.
그림 속 주인공은 19세기 오페라 여가수
빨강과 주황이 오묘하게 섞인 강렬한 색채가 전시장을 압도한다. 그리고 들어서는 순간 ‘아, 이게 포르나제티였군’ 할법하다. 국내외 인테리어 잡지에서 종종 봐왔던 한 여인의 얼굴이 벽에 걸려 있다. 여인은 전시장 곳곳에 등장한다. 접시에, 의자 등받이에, 주전자·꽃병·러그·우산꽂이 등등에. 포르나제티의 시그너처나 다름없다. 그 덕에 얼굴 전체가 아닌 한쪽 눈, 입술만 나와도 존재감이 분명하다. 누구일까.

그림의 주인공은 리나 카발리에(Lina Cavalieri)라는 실존인물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이탈리아 출신 오페라 가수다. 1952년 포르나제티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 여인의 모습을 프랑스 잡지에서 발견한다. 그러고는 완벽하게 대칭적인 얼굴이라 평하고 작품에 옮겼다. 이후 ‘주제의 다변화(Tema e Variazioni)’란 타이틀을 붙여 500여 개의 디자인으로 부활시켰다. 디자인의 변주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가늠해 볼 만한 작품들이다.

얼굴만큼이나 낯익은 작품은 또 있다. 석조 건물 외벽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캐비닛이다. ‘트루모 아키테투라(Trumeau Architettura)’로 불리는 이 작품은 문을 연 다음에야 비로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공간 분할과 조명을 이용해 마치 벽을 뚫고 새로운 공간이 펼쳐질 것 같은 입체감이 살아난다. 1951년 선보인 이 작품은 포르나제티의 명성을 최고조로 올려놨다.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건축가였던 지오 폰티가 만든 디자인을 포르나제티가 이후 재해석해 내놓은 것. 의자, 책상, 테이블 등 둘이 협업한 작품이 한둘이 아니건만 가장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무를 쓰면서도 마치 도자기처럼 매끈하게 만든 것이 눈길을 끄는데, 실크스크린 인쇄를 이용해 전혀 소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기법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는 많다. 부엉이가 줄줄이 앉는 모습이 그려진 띠벽지, 봄의 풀잎들이 들판처럼 펼쳐진 벽지들은 마치 천가방에 명품 가방을 찍어놓은 ‘페이크 패션’처럼 장난기가 넘친다.

반면에 어두운 방 한가운데 놓인 대리석 테이블, 그 상판에 새겨진 뱀 그림은 지극히 사실적이라 흠칫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가구들과 오밀조밀한 소품으로 가득찬 전시장 한쪽, 그의 초상화가 인상 깊게 걸려 있다. 거울에 반사된 양면의 얼굴, 뇌를 묘사한 그림이 작품만큼이나 위트가 넘친다.

스스로를 ‘타고난 화가’라 칭하며 열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려온 포르나제티. “음악의 뿌리가 음계인 것처럼 디자인의 뿌리는 결국 드로잉”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다.

6 빨간 마스크를 쓴 잠수부 의자.
시대와 사조를 거부한 예술가
이번 전시는 지난해 밀라노 현대미술관 트리엔날레에서 했던 ‘포르나제티 탄생 100주년 회고전’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작품 수는 100여 점으로, 규모만 따지자면 10분의 1 수준이다. 당연히 포르나제티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엔 부족하다. 그럼에도 관람은 꽤 흥미롭다. 예측하지 못했던 디자인 전시랄까. 화려한 장식을 강조하거나 단순히 기능을 앞세우는 양극화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십 년 전 아이디어가 전혀 촌스럽거나 예스럽지 않게도 느껴진다. 포르나제티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지 궁금해지는 건 그때부터일 터. 그러니 아들에게 묻는 첫 질문 역시 다른 선택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떤 예술가였나.
“뭔가 한 분야에서 규정되지 않으려는 분이었다. 시대와 사조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며 대학(브레라 미술 아카데미)을 중퇴하고 독자적으로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나. 이런 부분이 오랫동안 파트너가 됐던 지오 폰티와 가장 다른 점이었다. 그가 역사적 흐름을 중시해 50년대 건축과 디자인 사조를 따르려 했다면 아버지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려고 애썼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그의 철학은 분명했다. 예술은 시대와 상관없이 감각적일 것. 하지만 절대 유행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시간에 의해 예술품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뭔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 했다. 아트, 디자인, 패션을 교차하며 작업했다.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도 제한이 없었다. 그는 영혼을 가두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7 파란 방울 털모자를 쓴 여인의 의자 ‘럭스 그슈타트(Lux Gstaad)’.
-누구보다 독창성을 따지면서도 정작 흔한 생활 소품이 많다. 이유가 뭔가.
“디자인의 핵심을 실용성에 뒀기 때문이다. 누구나 쓰는 평범한 물건에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아버지가 말하던 디자이너의 역할이었다. 더구나 이런 물건들은 시간이 흘러 실제 상품 가치까지 높아지기도 했다. 이미 수많은 빈티지 디자인 작품이 이를 입증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건 서른둘이 지나서였다. 그 역시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처음부터 아버지 휘하로 들어가진 않았다. 텍스타일 디자인, 잡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심지어 토스카나 시골의 농가 개조 프로젝트까지 마치고 나서야 그는 아버지와 함께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주 강하고 확실한 분이었다. 창의적인 예술관을 지니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순응주의자였다. 당시 급진적이었던 나와는 그래서 자주 싸웠다. 아버지처럼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함께 일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82년 어떻게 합치게 됐나.
“80년대 들어 사업이 어려워졌다. 당시 아버지는 작은 공방에서 직접 모든 작품을 만들었고 따로 사업을 도맡아 해줄 사람도 없었다. 건강마저 안 좋아져 나를 찾으신 것이다. 나는 영광스럽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협업을 시작했다.”

-함께 일하면서 가장 남달랐던 점이 있다면.
“그는 시간을 앞선 사람이었다. 늘 이탈리아의 최초였다. 그러기 위해 작품에 온 힘을 쏟았다.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포르나제티의 비밀이 뭔지 궁금해했다. 아버지의 답은 작업에 임할 때는 가혹할 만큼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나.
“현대성(Modernity)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 그것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그는 현대성, 이것이 사람들을 기술의 희생양으로 만든다고 했다. 기술을 이용해 더 빨리, 더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다 보면 그것에 매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열정과 창조에 바쳐져야 할 시간이 마치 불필요한 ‘사치’로 여겨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8 1950년에 디자인한 나무 테이블. 9 잎 무늬로 전체를 꾸민 테이블. 10 별자리가 그려진 공작석(孔雀石) 테이블.
11 러그 ‘큰 뱀’. 12 러그 ‘입맞춤’.
차곡 차곡 쌓인 자료 1만1000여 점
사람들은 그를 ‘전통의 관리인’이라고 칭한다. ‘포르나제티’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현재의 디자인은 모두 아카이브에서 모티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명품 브랜드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다른 브랜드와의 활발한 협업이다. 향수, 패브릭, 벽지 등 분야 역시 다양하다. 그가 택하는 다양한 업체가 ‘포르나제티’라는 라이선스를 갖고 제품을 생산한다.

-다양한 협업이 상업적으로 변질될 우려는 없나.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에게만 라이선스를 준다. 예를 들어 향수의 경우 샤넬 넘버5 조향사의 아들이 어느 날 우리 공방을 찾아왔다. 그는 며칠을 머물면서 영감을 받아 만든 향을 내게 맡아보라고 선보였다. 이전까지 향수는 전혀 모르는 분야였지만 전문가가 포르나제티의 색깔을 찾아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량을 제한해 희소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가령 도자기 분야가 그렇다. 차이나 포슬린이 파트너가 돼 한정 수량으로 만드는데 그쪽도, 우리도 쉽게 볼 수 없는 디자인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맞아떨어졌다.”

-아카이브 관리는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드로잉과 오리지널 디자인 스케치가 서랍장 한쪽에 정리돼 있다. 대략 1만1000여 개쯤 된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여기에 접목시킬 만한 미술 서적, 잡지에서 따온 모티브 자료들이 모아져 있다.”

-아버지의 작품 중 최고를 꼽는다면.
“항상 바뀐다. 지금은 아키테투라(Achitetura) 시리즈 중 빈티지 캐비닛이다. 고객 주문으로 맞춤제작했던 것인데, 기존 캐비닛보다 두 배쯤 큰 아주 독창적인 작품이다.”

-앞으로 이어갈 포르나제티 디자인의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 것도 파괴될 수 없고 어떤 것도 창조될 수 없다. 대신 모든 것이 변모할 수 있다.”

그는 전시가 회고(retrospective)가 아닌 복고적 관점(retroperspective)으로 표현되길 바란다고 했다. 포르나제티가 남긴 작품들이 단순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확신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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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