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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활의 움직임 고운 음들이 마음 노크

바이올린 팬들에게 막심 벤게로프(40)는 안타까운 이름이었다. 비르투오소(테크닉과 예술성을 겸비한 연주가)의 대명사였던 그는 2007년 손에 부상을 입었다. 지휘자로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바이올린은 연주하지 못할 거란 얘기였다. 잘하면 비올리스트로 컴백이 가능하리란 전망도 희망이 되진 못했다.

무려 4년 동안 바이올린을 내려놓아야 했던 그가 2011년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는 소식이 조용히 전해졌다. 그러던 벤게로프가 20일 예술의전당에서 폴리쉬 체임버와 내한공연을 가졌다. ‘재기 무대’라고 알려졌지만 심드렁한 팬들은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벤게로프의 현재에 대한 진단은 빨리 내려지리라 생각했다. 1부 프로그램이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과 5번이었기 때문이다. ‘천의무봉’이란 말을 연상시키는 모차르트 곡들이 대개 그러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가 잘한다 해도 본전이요, 조금만 어긋나면 실수가 더욱 부각되게 마련인 작품들이다.

그러나 1부에서 벤게로프는 흠결을 찾아볼 수 없는 연주를 펼쳤다. 조심스러운, 약간은 소극적이었던 폴리쉬 체임버의 반주와 대조적으로 벤게로프의 바이올린은 모차르트 협주곡 4번과 5번에서 고전주의의 곡선을 우아한 리본처럼 뽑아냈다. 벤게로프 역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연주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서 어떤 봉인이 떨어져 나갔다고 느낀 건 5번 3악장에서였다. 갑자기 전환되는 터키 풍의 악상에서부터 벤게로프는 다른 고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2부는 본격적인 바이올린의 향연이었다. 활에 힘이 실렸다. 5단 기어처럼 보잉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가져갔다. 1부에서 벤게로프는 폴리쉬 체임버와 비슷한 색조의 객관성으로 무장했었다. 2부에서 그는 주관성으로 무장한 채 스트라이크존 같은 객관성의 허용치에 걸친 변화구를 던지는 투수 같았다. 차이콥스키의 작품들인 ‘우울한 세레나데’와 ‘소중했던 시절의 추억’ 중 ‘스케르초’와 ‘멜로디’, 왈츠 스케르초 Op.34를 이어서 연주하려 했다. 그러나 감동적인 ‘멜로디’ 다음에 터져 나온 청중들의 박수 소리까지 애써 막지는 않았다.

한편 이날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이어진 생상스의 두 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바네라’는 무대에서 직접 듣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느다랗고 또렷한 고음이 소름 끼치는 걸 넘어 전율을 불러 일으켰다. 절묘한 보잉은 듣는 이의 뇌리 속에 20세기 거장들을 하나 둘 소환하게 했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각도와 경사를 달리하는 롤러코스터의 느낌이었다. 기교를 타고 오르다 마침내 급격한 비탈길을 굴러 떨어지는 듯한 종반부에서 벤게로프의 연주는 귀기가 어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한 활쓰기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러나 보여주기 위한 기교는 결코 아니었다. 작품의 충실한 완성도에 오롯이 봉사하는, 필수적이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직접적인 메시지였다.

어느덧 프로그램의 곡들을 다 연주했다. 꽉 들어찬 바이올린 레퍼토리가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 순간 벤게로프의 연주를 들으며 귀가 전혀 피로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끝이 둥글게 세공된 음이 마음으로 공명했다.

객석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높은 데시벨의 앙코르 요청이 회오리쳤다. 벤게로프는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1번과 5번을 기교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연주했다. 더 들려달라는 청중의 열화와 요청에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양해를 구하고 공연을 마무리 지었다.

1972년 결성된 폴리쉬 체임버는 최근의 연주단체들과는 사뭇 다른 보수적인 경향을 보여 주었다. 다이내믹함이 적고 정적인 이들의 특성은 결과적으로 벤게로프가 돋보이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벤게로프의 연주에는 처방전 같은 로드맵에 따른 절제가 존재했다. 거기엔 듣는 이를 감질나게 하고 빨리 다음 내한공연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의 부활은 짜릿했다. 이제 벤게로프의 리사이틀이 보고 싶어진다. 그가 다시 온다면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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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