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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보고서 불태워야 세월호 넘는다

이하경
논설주간
반전(反戰)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 작가 레마르크의 1차대전 참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조국애를 내세운 선생님의 권유로 학교 친구들과 함께 참전했다. 레마르크처럼 주인공도 18세의 소년병이었다. 친구들은 공포와 고통 속에 차례로 죽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전사하던 날 사령부의 전황 보고서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 보고할 사항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소설은 무력한 개인이 감당하는 실존적 고통의 무게가 조직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는 비정함을 그려내고 있다.

 2014년 5월의 대한민국은 지옥의 탄식이 지배하고 있다. 세월호는 무리한 개조에 과적으로 기운 상태로 서해바다를 떠다니던 위태로운 구조물이었다. ‘바다 위의 시한폭탄’에서 일하던 기관사들은 공포에 질려 줄줄이 회사를 떠났다. 세월호를 운영하는 청해진해운의 직원은 국민신문고에 회사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 정부의 단 한 사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보고서 정부다. 서류더미에 가려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3000개가 넘는 매뉴얼로도 선실에 있던 어린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 총리실이 작성한 국정과제 평가 보고서를 훑어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이 정부 출범 1년 동안 추진한 140개 국정과제를 ‘우수·보통·미흡’으로 평가했는데 83번 과제인 ‘총체적 국가재난 관리체계’는 ‘우수’ 평가를 받았다. 평가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대학교수고 다른 한 사람은 정홍원 국무총리다. 10명의 평가위원과 민간 전문가 120명이 평가에 참여했다. 이런 내용은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이 2월 5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레마르크의 수사법을 빌리면 ‘서해바다 이상 없다’는 보고서였다. 하지만 두 달 뒤 세월호는 온 국민이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침몰했고 300명이 넘는 사망·실종자를 냈다. 현실과 동떨어진, 불통의 보고서였다.

  민주주의 시대인 지금 정부의 소통능력은 왕조시대만도 못하다. 조선의 군주들은 불완전한 보고서와 싸웠다. 보고서가 보여주지 못하는 현실을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민심을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사형수는 3심제를 적용했는데, 세 번째 재판 때는 왕이 직접 재판장이 돼서 증거의 진위를 검증했다.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 아닌지 집요하게 신문했다. 상당수를 감형하거나 무죄로 풀어주었다.

 백성들은 원통한 사연을 글로 써서 왕에게 알렸다. 상소였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궐 밖에 설치된 북을 쳐서 형조의 당직관리를 불러내 하소연하면 왕에게 전달됐다. 신문고였다. 왕은 행차할 때 백성들이 꽹과리나 북을 치면 멈춰서 사연을 들어주었다. 격쟁(擊錚)이었다. 이런 필사적인 소통의 노력으로 조선은 518년이나 존속할 수 있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며칠 안 돼 한 실종자 가족은 “우리 요구를 전달하려 하는데 해경청장도 전화 안 받고, 정부종합상황실 책임자도 연결이 안 된다.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움직이지 말라”는 무책임한 안내방송 때문에 선실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마트폰으로 생생하게 상황을 알렸다. 이 정부의 단 한 사람이라도 현장의 실상을 파악해 “밖으로 나오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면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 국민들은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소통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정부다. 국민과의 소통도 안 되고 내부 소통도 안 된다. 장관들은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기만 한다. 소신도 없고, 그저 눈치보기와 자리 보전에만 바쁘다. 토론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니 엉터리 보고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140개 국정과제 전체가 제대로 이행되고, 평가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조선의 왕은 백성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까지 했다. 2014년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민심을 만나려면 국회로 달려가면 된다.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은 민의를 대변하는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다. 특히 야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쓴소리도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적과 비판이 문제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5년 단임의 대통령은 야당과 집권을 놓고 다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지금처럼 야당을 무시하고 독주한다면 또 다른 세월호를 비켜갈 수 없다. 야당과 손잡을 때 ‘100% 대한민국’이 실현된다. 진실을 가리는 보고서의 치명적인 주술에서 깨어날 수 있다. 보고서를 불태우고 살아 꿈틀거리는 현실의 세계, 민심의 바다에 뛰어드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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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