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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고려 왕실, 식은 차 마신 후 뜨거운 물에 우려낸 탕 즐겨

고려시대 차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중국 북송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서긍은 휘종의 국신사절로 12세기 초 개경을 방문했다. [사진 박동춘]
고려시대는 차 문화의 전성기였다. 11~12세기 무렵, 고려 차의 품질이나 다구(茶具)는 이미 화려한 차 문화를 꽃피웠던 송(宋)과 비견할 만큼 발전됐다. 고려적인 색채가 두드러진, 맑고 그윽한 아름다운 비색이 또렷한 청자 다완(茶碗)은 찻잔의 극치미를 드러냈다. 이러한 찻잔의 출현은 이미 이 시기의 차 문화가 절정기였음을 나타낸다. 더구나 왕실과 사대부·승려들이 즐겨 사용했던 청자 다완은 눈처럼 희디흰 백차의 다말(茶沫)이 돋보이도록 설계된 것이며, 섬세한 다말이 부드럽게 입안으로 넘어가도록 고안된 과학적이고도 완벽한 다구였다. 고려인의 독창적인 차에 대한 미감과 안목은 이렇게 빛났다. 특히 이 시기에 유행했던 백차(白茶)는 섬세하며, 절정의 미적 감수성을 가졌던 송 휘종(1100~1125)이 가장 먼저 즐겼던 차다. 이후 백차는 귀품의 차로 상징됐다. 송대의 건요 찻잔이나 흑유 찻잔의 출현은 백차의 미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6> 차 문화 전성기 11~12세기

검은 흑유 잔에 담긴 희디흰 다말! 흑색과 백색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조화의 극치를 이룬 차의 세계, 이는 휘종의 안목이 만들어낸 극치미의 예술세계였다. 이로부터 차는 정신을 맑게 하는 음료에서 숭고미를 간직한 예술로 승화됐다. 따라서 고려시대 청자 다완은 당시 유행했던 차의 예술적 감수성을 극대화한 찻잔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서긍(徐兢·1101~1153)은 이러한 풍요로운 차 문화를 구가하던 시기에 고려를 방문했다. 북송 휘종의 국신 사절로 파견된 것이다. 그는 개경을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엮어 휘종에게 사행보고서(使行報告書)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약칭 『고려도경』)이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사회·문화·제도·풍물·음다문화·해로 등을 사실대로 기록했다. 이는 고려의 차 문화뿐 아니라 제도·문물·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도경』이 저술된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보자. 서긍의 사절단은 선화 5년(1123) 2월부터 사행을 준비해 특별히 건조한 관선, 신주 2척과 민간 소유인 객주 6척으로 선단을 구성해 3월 14일 배편으로 변경을 떠나 5월 4일 명주에 도착했다. 정사와 부사 및 사무를 관장하는 도활관(都轄官)과 제활관(諸轄官), 뱃사람 등 대략 200명이 넘는 규모였다. 이들은 명주에서 출발, 군산도에 도착한 후 다시 예성항으로 입항해 개경으로 들어갔다. 고려에 올 때는 남풍을 이용하고, 송으로 돌아갈 때는 북풍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은제 금도금주자 ▼중국 송대 찻잔인 토호잔. [미국 보스턴 미술관]
서긍은 인종(1122~1146)이 즉위한 이듬해 개경을 다녀갔다. 서화에 비상한 재주를 지녔던 그는 특히 산수화와 인물화에 능했다고 한다. 그가 짧은 사행기간 동안에 풍부한 내용뿐 아니라 그림까지 곁들인 『고려도경』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예리한 관찰력과 문장력, 그리고 빼어난 서화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사행 길에 오른 시기는 암울했다. 북쪽으로는 요(遼)와 금(金)의 압박과 서남쪽으로 서하(西夏)의 독립으로 인해 북송의 위세는 더욱 약화됐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 예종(1106~1122)은 금과 요를 적절히 이용해 국내 안정을 도모했으며, 북송과의 교류를 통해 문치의 터전을 닦았다. 이렇게 대외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북송은 고려와의 친교를 굳건히 하고자 여러 차례 사절단을 파견한다. 서긍이 국신 사절단으로 고려에 파견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러나 북송 휘종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진을 통일한 금은 요를 멸망시킨 후 1127년 송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킨다. 이런 와중에 휘종은 금의 포로가 되어 불고(不顧)의 혼이 됐다.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것은 북송이 금에 멸망되기 4년 전이었다.

서긍은 화주(和州) 역양(歷陽) 사람이며, 권문세가 출신이다. 그의 자(字)는 명숙(明叔)이며, 호는 자신거사(自信居士)다. 정화 4년(1114)에 장사랑에 임명됐고, 선화 5년(1123) 국신사 중에 소제할인선예물관(所提轄人船禮物官)으로 고려에 파견됐다. 그는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 국신소 사절단(國信所 使節團)의 일환으로 파견됐으나 예종의 서거로 제전(祭奠)과 조위(弔慰)의 임무를 함께 수행했다. 그가 개경에 머문 기간은 대략 한 달 정도다. 공무에 시달리고 행동의 제약 속에서도 『고려도경』을 엮을 자료를 수집, 소묘와 비망기를 적어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이 보고서는 그가 개경을 다녀간 후 대략 1년 만인 선화 6년(1124)에 완성된다. 휘종은 이 보고서를 보고 기뻐하여 그에게 관직과 지위를 올려주었다. 원래 『고려도경』은 원본과 부본 두 본을 만들어 원본은 휘종에게 올리고, 부분은 그의 집에 보관했는데 마을 사람 서주빈이 서긍이 보관했던 부분을 빌려갔다가 정강의 난(1126)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서긍의 아들 서천(徐蕆)이 아버지를 따라 강서 홍주(지금의 남창)에 있을 때 북쪽에서 온 상관생에게 『고려도경』을 얻었는데, ‘해도’ 두 권만이 원래대로 그림과 글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그림은 유실된 채 글만 남아 있었다. 이것을 저본으로 건도 3년(1167)에 『고려도경』40권을 판각했으니 이것이 초판본 『고려도경』이다. 혹자는 고려본의 『고려도경』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이 책의 소재는 알려진 적이 없다.

당시 서긍은 송 황실의 회사품(回賜品)인 용봉단(龍鳳團)을 가져왔으리라 짐작된다. 용봉단차가 송의 회사품으로 고려에 처음 하사된 것은 문종32년(1078)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편에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 정묘일 태자를 순천관에 보내 송나라 사신을 인도하여 오게 하였다…별도로 보내 온 용봉차가 10근인데 한 근씩 금으로 도금한 은 죽절합자에 넣어 밝은 금 오채로 장식하고 요화판 주칠갑에 담아 붉은 꽃무늬 놓은 비단 겹보로 각각 쌌는데, 용차가 5근이고 봉차가 5근이었다.(六月丁卯 命太子詣順天館導宋使…別賜龍鳳茶一十斤 每斤用金鍍銀竹節 合子 明金五綵 裝腰花板朱漆匣盛 紅花羅夾帕複 龍五斤鳳五斤) 『고려사』 ‘세가’

순천관은 바로 송나라 사신이 묵었던 전각의 이름이다. 당시 송 사신은 신종(神宗)이 보낸 용봉단차를 문종에게 전했다. 용봉단차는 원래 용차와 봉차를 합성해 부르는 차 이름이다. 용차는 황제가 마시는 차이고, 봉차는 공주나 왕자, 왕실 귀족들이 즐기는 차다. 이 차를 금 도금한 은 죽절합자에 담아 보낸 것인데 한 근씩 별도로 포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송 황제는 변방을 회유하기 위해 귀품의 차를 전례대로 하사한 것이다.

고려 왕실에서는 연회를 열어 사신들에게 차를 대접했다. 이때 마셔본 고려차를 평하여 “고려에서 생산된 차는 쓰고 떫어 마실 수 없다(土産茶 味苦澁不可入口)”라 하였다. 이어 “연회 때면 뜰에서 차를 끓여 은하(銀河)로 덮어 천천히 내 오면 시중드는 사람이 ‘차를 다 돌렸습니다’라고 한 후에야 마실 수 있었으니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凡宴則 烹於廷中 覆以銀荷 徐步而進候 贊者云 茶遍乃得飮 未嘗不飮冷茶矣)”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이는 서긍이 고려에서 생산된 차를 마신 후 차 맛을 평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품평이 정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신 차가 쓰고 떫었던 것은 차가 식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따라서 그가 고려에서 생산된 차는 “쓰고 떫어 마실 수 없다”고 한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더구나 그가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 증언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케 한다.

그렇다면 당시 서긍은 무슨 연유로 식은 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는 고려 왕실 궁중의례의 독특한 절차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고려에서는 백차를 즐길 수 있는 다완이 생산됐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근래 차 마시기를 제법 좋아해 다구를 더욱 잘 만든다. 금화오잔이나 비색소구, 은로탕정 같은 다구는 모두 중국 것을 은근히 모방한 것이다(邇來 頗喜飮茶益治茶具 金花烏盞,翡色小甌 銀露湯鼎 皆窃效中國制度)”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금화오잔(金花烏盞)은 송에서 유행했던 흑유잔(黑釉盞)이나 토호잔(兎毫盞)처럼 차의 미감(美感)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찻잔이다. 또한 왕실에는 다구를 갖추어 언제나 차를 즐길 수 있었으니 이는 “관사 안에는 붉은 찻상을 놓고, 그 위에다 차를 마실 때 쓰는 도구를 두루 진열한 다음 홍사건으로 덮었다(館中以紅俎布列茶具於其中 而以紅紗巾冪之)”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당시 서긍이 관찰했던 고려 왕실의 음다 풍속은 다음과 같았다.

하루 세 차례 올린 차를 마신다. 이어서 탕이 나온다. 고려인들은 탕(湯)을 약(藥)이라고 한다. 매번 사신들이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만약 다 마시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여겨 불쾌히 여기며 가 버리기 때문에 항상 억지로라도 마셨다.(日嘗三供茶而繼之以湯麗人謂湯爲藥每見使人飮盡必喜或不能以爲慢己 必怏怏而去故 常勉强爲之啜也)『고려도경』 ‘기명(器皿)3, 다조(茶俎)’

이는 왕실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됐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차를 마신 후 탕이 나오고, 이것을 약이라고 한 것을 주목해 보자. 이 탕법은 중국에서는 상용된 적이 없었다. 탕은 뜨거운 물이나 잎차를 우린 차를 마신 것으로 보인다. 식은 차를 마신 후 탕을 마시는 것은 차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탕을 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독특하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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