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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자유 찾은 장쉐량 “내가 살아 있는 건 쑹메이링 덕”

장쉐량은 쑹메이링 일가와 가까웠다. 쑹메이링의 오빠 쑹즈원(가운데 안경 낀 사람)과 함께 동북군 주둔지를 둘러보는 장쉐량(앞줄 오른쪽 흰 코트). 1933년 2월 17일, 베이징 교외. [사진 김명호]
여자들은 묘한 속성이 있다.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어도, 남편이 싫어하는 사람은 무조건 싫어하기 마련이다. 상대가 남편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인류가 생긴 이래, 트집 잡힐 거리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73>

장쉐량과 장제스·쑹메이링 부부는 중국 역사에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아니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한때 남북을 양분했고,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 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 아닌 일인지하 억인지상(一人之下 億人之上)이었다. 그래서 얘깃거리가 된다.

쑹메이링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가장 맹렬히 활동한 여성 정치가였다. 말로만 신의를 외치며 뒤로는 딴짓하는 남자들보다 신의를 중요시 여겼다. 아버지가 국부 쑨원(孫文·손문)에게 했던 것처럼 남편 장제스에 의해 죄수로 전락한 장쉐량을 죽는 날까지 극진히 챙겼다. 감정도 숨기지 않았다.

2001년 가을, 장쉐량이 101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뉴욕에 있던 쑹메이링은 104세였다. 거동이 불편했을 뿐, 정신은 맑았다. 장쉐량 사망을 보도한 뉴욕타임스를 보자 소파에 기댄 채 통곡했다. 간호사가 구술을 남겼다. “차마 옆에서 볼 수가 없었다. 건강이 염려됐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또 가슴을 치며 흐느꼈다. 정신이 들자 타이완으로 전화를 걸었다. 총통부 고문 한 사람에게 나 대신 하와이에 다녀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또 흐느꼈다. 그리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쑹메이링과 함께 군 부대 시찰에 나선 장제스(오른쪽). 1929년 6월 26일, 우한(武漢).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사변’을 일으킨 장쉐량은 53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됐지만 서신 왕래는 자유로웠다. 국민당 요원과 군 지휘관, 동북군 원로, 친구 등 150여 명과 10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장쉐량 자료실(毅荻書齋)’에 장쉐량의 서신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쑹메이링이 장쉐량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한다. 연금지의 장쉐량에게 보낸 편지가 남편 장제스나 장징궈, 자손들에게 보낸 것을 합한 것보다 많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호칭도 남편을 인질로 삼아 “국공합작과 항일전쟁 수행, 국민당 개조”를 요구하던 시안사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졸졸 따라 다니는 장제스에게 넌덜머리를 내던 노처녀 시절, 칵테일 파티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칭(漢卿)’이라 불렀고, 장쉐량 원수(Marshal Chang Hsueh-Liang)라는 존칭도 서슴지 않았다.

안부를 걱정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잔소리도 했다. “나는 너 같은 젠틀맨을 본적이 없다. 성질이 너무 급한 게 탈이다. 제발 그 성격 좀 고쳐라. 내가 보낸 와이셔츠는 바지 안에 넣지 말고 빼서 입어라. 사탕을 선물로 받았다. 먹어보니 맛있기에 함께 보낸다. 한꺼번에 몰아서 먹거나 와작와작 씹어먹지 마라. 먹고 난 후에는 꼭 이를 닦아라.”

쑹메이링은 장쉐량의 고향 소식도 자주 전했다. 1947년 9월, 중국 신문에 장쉐량의 고향 소식이 실렸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에게 기사를 스크랩해서 보냈다. 장쉐량도 답장을 보냈다. “과일과 약품 잘 받았다. 내 원적이 하이청(海城)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할아버지와 조상들의 분묘가 그곳에 있다고 한번 말했을 뿐인데, 기억해 줘서 고맙다.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죄인의 몸이다. 잘 있으니 괘념치 마라.”

1990년, 자유를 획득한 장쉐량에게 기자가 물었다. “쑹메이링과는 도대체 어떤 사이였습니까?” 장쉐량은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쑹메이링의 보살핌 덕분이다. 나는 장제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사람은 나를 죽이려 했다. 나도 한동안은 잘 몰랐다. 존슨(Nelson Trusler Johnson. 1921년부터 41년까지 주중대사 역임)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쑹메이링은 항상 장쉐량에게 미안해했다. 남편 장제스와 장쉐량 문제로 다툴 때마다 장쉐량을 두둔했다. “시안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봐라. 장쉐량은 우리에게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다. 돈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직 희생만을 요구했다. 장쉐량에게 손만 대봐라, 그날로 나는 중국을 떠나겠다”며 사납게 몰아붙였다.

쑹메이링이 그럴 때마다, 장제스는 얼굴이 벌개진 채 창 밖만 내다봤다.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장쉐량을 끼고 돌아도 모른 체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복잡한 얘기는 몇 십 년 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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