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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개혁에 갇힌 경제민주화, 양극화 못 풀고 ‘방황’

국제통화기금(IMF)은 늘 냉혈한 인상을 풍긴다. 자유화와 경쟁이라는 시장경제 논리의 첨병을 자임해서다. 성장을 위해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신자유주의 전도사였다. 부자와 선진국만 배려하고, 가난한 사람과 개발도상국에는 싸늘하다는 비난을 받곤 했다.

빈부격차 심각성 일깨운 ‘피케티 신드롬’

하지만 그런 IMF도 이젠 달라졌다. 소득 불평등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나섰다. 지난 1월과 2월 ‘재정정책과 소득 불평등’ ‘재분배, 불평등 그리고 성장’ 보고서를 잇따라 내면서다. IMF는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재분배 정책을 역설했다. “재분배와 성장은 모순되지 않는다”며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서 불균형을 외면하는 건 실수”라고 했다. “빈부격차를 완화해야 더 빠르고 지속가능한 성장도 가능하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환골탈태다. 부자 나라들의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최근 1981~2012년 사이 18개 회원국 통계를 바탕으로 빈부격차의 확대가 심각한 수준이란 보고서를 냈다. 75~2007년까지 미국민 전체 소득 증가분 중 47%를 상위 1%가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그 결과 나머지 99%는 소득 증가를 체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IMF와 유사한 성향인 다보스포럼도 지난 1월 불평등을 핵심 주제로 잡았다. 전 세계 자산의 절반(12경1000조원)을 전 세계 인구의 1%(6000만 명)가 소유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발표됐다. 학계의 관심도 쏠리고 있다. 미 버클리대 이매뉴얼 새즈(Emmanuel Saez) 교수의 연구는 충격적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늘어난 미국의 소득 중 무려 95%를 상위 1%가 챙겨 갔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부자 감세가 양극화 심화
그렇다면 빈부격차가 확대된 원인은 뭘까.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본성에서 찾는다. 자본의 이익률이 경제성장률을 늘 앞지르기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진전이나 지식기반 산업화 등 외부 요인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해법도 과격하다. 상위 1%의 특권계급에 최고 80%의 누진세율을 매겨 부의 축적 자체를 봉쇄하자는 것이다.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리는 걸 막기 위해 세계 각국 정부가 공조해 ‘글로벌 부유세’를 매기자고도 했다.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피케티는 “만국의 정부여 단결하라”고 주문한다. 이 때문에 그의 진단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복음처럼 칭송 받으면서도 그의 처방에 대해선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OECD의 분석은 훨씬 현실적이다. 부자 감세가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분석 대상 18개국 소득세 최고세율은 81년 평균 66%에서 지난해 43%로 떨어졌다. 상속·증여세나 부유세를 대폭 낮추거나 아예 폐지하는 게 세계적인 유행이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OECD는 부자 증세와 함께 기업 경영진에게 스톡옵션이나 각종 편의 제공 등의 형태로 주어지는 간접 소득에도 세금을 물리자고 제안한다.

세계화와 지식기반 산업이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시각도 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과거 산업사회에선 기계 매뉴얼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못 읽는 사람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면, 오늘날엔 정보 수집·가공 능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큰 격차가 세계적 차원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양극화가 빠르고 깊게 진행된다”고 했다. 지식기반 산업이 원인이라면 평생교육을 통한 지식 격차 축소가 해법이 될 수 있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 소득 불평등도를 비교하는 지표로는 지니계수가 주로 쓰인다. 수치가 낮을수록 평등하다는 뜻이다. OECD에 따르면 2010년 한국의 지니계수는 0.310으로 OECD 평균(0.314)보다 낮다. 34개 회원국 중 불평등도가 17번째로 중간 수준이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보다는 못하지만 미국·영국·일본보다는 평등한 사회라는 얘기다.

한국 소득 불평등도 OECD 34국 중 17위
이에 비해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분석은 사뭇 다르다. ADB가 90~2010년 사이 20년간 아시아 지역 28개국의 지니계수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연평균 0.9% 상승해 전체 조사국 가운데 다섯째로 빈부격차가 빠르게 확대된 것으로 나왔다. 90~2012년 지니계수 추이에 따르면 93년부터 악화되던 빈부격차는 98년 외환위기 때 급격히 커졌다. 2000년엔 반짝 개선되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로 다시 나빠졌다. 특히 중산층이 두 차례 위기 때마다 타격을 입었다.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격차는 지표보다 훨씬 심각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가 단적인 예다. 100명 중 33명은 “양극화가 매우 심각하다”고 했다. 한 단계 완화된 표현인 “양극화가 심각하다”고 응답한 사람까지 합치면 100명 중 무려 95명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선(先)성장, 후(後)분배’를 얘기하고 OECD 중간쯤인 지니계수 운운해봐야 먹혀 들기 어렵다. 풀릴 기미가 안 보이는 청년실업에 최근 금융업계에마저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면서 중산층이 피부로 느끼는 상실감은 더 커졌다.

2012년 두 차례 선거에서 경제민주화가 최대 이슈로 떠오른 이면엔 이런 위기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극화의 심각성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빈부격차 확대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호기였다. 그러나 선거전 와중에서 경제민주화란 구호는 곧바로 ‘재벌 개혁’이란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경제민주화란 단어 자체에 정치 권력에 버금가는 경제 권력에 대한 견제란 의미가 내포돼 있었기 때문이다.

재벌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기업구조다. 과거 권위주의 정치 권력이 압축성장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잉태된 경제 권력이기도 하다. 이러다 보니 재벌 오너 계열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나 골목상권 침해, 불공정 하도급 거래 시정 등이 경제민주화의 주요 과제로 떠오른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재벌 때리기는 빈부격차 완화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예컨대 불공정 거래에서 가장 강조되는 게 일감 몰아주기다. 그런데 이를 근절한다고 양극화가 크게 개선되긴 어렵다. 재벌 오너가 일감 몰아주기로 버는 돈이 양극화를 완화할 정도로 크지 않아서다. 불공정 하도급거래도 마찬가지다. 하도급도 받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의 상태가 더 열악한 게 현실이다. 요컨대 재벌그룹 오너를 감옥에 넣고, 단가를 부당하게 후려치거나 일감을 몰아주지 못하게 하는 건 ‘을’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줄 청량제가 되겠지만, 실질적인 소득 불평등 완화 효과는 크지 않다는 얘기다.

더욱이 재벌 때리기는 불황에 취약하다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한 개의 일자리가 아쉬운 판에 재벌 옥죄기로 대기업 투자가 위축되면 역풍을 맞게 돼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의 추진력이 갈수록 떨어진 건 이와 무관치 않다. 서구에서 피케티가 록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지만 ‘1% 대 99%’ 프레임을 앞세운 그의 ‘글로벌 부유세’ 제안이 돈키호테식 발상으로 치부되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포퓰리즘 대신 실질 대책 절실
다만 ‘피케티 신드롬’을 계기로 빈부격차 확대의 심각성에 대해선 세계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도 양극화의 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 박근혜 정부가 들고 나온 규제 개혁이 벌써부터 ‘재벌 봐주기’ 아니냐는 비판에 봉착한 것도 양극화의 부메랑 효과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본질을 제대로 짚을 필요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진단이다. 임금과 노동시장의 불평등이나 고령화, 여성 취업, 근로시간 단축이 양극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직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지정하고 대형 유통업체 영업을 제한한 결과 실질적으로 격차가 해소됐는지 진보진영도 제대로 된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재정정책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재정 건전성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함께 양극화의 완화를 위해 재정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재검토와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20%도 채 안 되는 조세부담률과 8%도 안 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예산 비중으로는 양극화 완화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렇다고 무작정 증세를 하다간 경기가 더 위축될 위험도 있다. 그 같은 복잡미묘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선거철 표를 겨냥해 내던지는 후련한 구호가 아니라 중산층을 복원할 실질적이고 정교한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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