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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뒤 불경기 의식 성장론으로 선회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10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 시절 중소기업 정책간담회에서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중앙포토]
경제민주화는 2012년을 관통하는 최대 이슈 중 하나였다. 그해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각종 공약과 전문가 영입 등을 통해 경제민주화를 제1의 어젠다로 내세우며 표심 잡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제민주화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경제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로 자리 잡는 듯했다.

경제민주화 논의 어떻게 변해왔나

하지만 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2개월이 지난 지금 경제민주화 담론은 더 이상 주요 국정과제로 거론되지 못하고 있다. 경제성장 기조에 밀려 뒷방 신세로 전락해버렸다는 지적도 적잖다. 경제민주화는 왜 이렇게 흐지부지된 것일까. 박 대통령은 과연 경제민주화에 진정한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여야와 학계의 진단은 사뭇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새 정부 국정목표에서 경제민주화 빠져
박 대통령은 2012년 7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국민행복 3대 과제 중 첫째로 경제민주화를 언급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앞세우며 경제민주화 논의를 주도해나갔다. 하지만 정책대결이 한창이던 그해 9월부터 박근혜표 경제민주화에 물음표가 붙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이한구 당시 원내대표가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고, 이에 김종인 위원장이 “상식 이하의 발언”이라고 맞받아치면서 설전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은 “두 생각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애매하게 봉합했다.

선거전이 종반으로 향하던 그해 11월 박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대기업의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문제 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김 위원장은 반발했고, 결국 최종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 불참하면서 “경제민주화가 난관에 부닥친 것 아니냐” “김 위원장이 토사구팽된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이런 흐름은 박 대통령 당선 후 더욱 구체화됐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해 2월 발표한 5대 국정목표에서 경제민주화 용어를 빼고 그 자리에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라는 표현을 포함시켰다. 7개월 전 국정의 제1 목표로 제시됐던 경제민주화가 창조경제와 일자리보다 한 단계 밑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인사에서도 성장 중심의 시장론자인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등용되면서 경제민주화는 뒷전으로 밀린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 강석훈 당시 인수위 분과위원은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가 경제민주화보다 더 광의의 개념으로, 실제 공약집에는 경제민주화 공약이 모두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취임 후 박 대통령의 발언은 이 같은 해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해 4월엔 “기업의 투자를 누르는 게 경제민주화가 아니다. 경제민주화 법안 중엔 공약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그해 8월 10대 그룹 회장단과의 오찬에서는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투자 확대에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제민주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견해가 힘을 얻어갔다.

“경제민주화 없는 경제활성화는 마약”
경제민주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취임 전후 발언이 이처럼 확연히 달라진 이유는 뭘까.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는 대통령의 소신 부족을 꼽았다. “경제성장이란 조급증에 사로잡힌 상황에서 정치권과 관료사회로부터 ‘경제를 살리려면 경제민주화로 기업들을 압박해선 안 된다’는 말을 계속 듣다 보니 흔들리게 된 것”이란 지적이다.

김상조(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연구소장은 한발 더 나아가 “취임 후 대통령의 잇따른 발언이나 인사로 볼 때 경제 상황을 감안한 속도 조절 차원을 넘어 경제민주화 의지의 후퇴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는 정치권력이 우위에 서서 경제권력의 탐욕을 제어하겠다는 발상의 산물로, 정치적 권위주의와 결합된 이런 사고방식은 처음부터 한계가 뚜렷했다”며 “이 때문에 전체 구조를 개혁하기보다 대기업의 불법 행위만 단속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야권은 “박 대통령이 선거용으로 경제민주화를 갖다 쓰고는 집권 후 용도폐기했다”는 입장이다. 야당이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을 내세운 뒤 복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2011년 4월 분당을 재·보선과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여당도 경제민주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경제민주화 후퇴 논란이 불거질 당시 여당 내에서도 “경제민주화는 대선 때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새누리당 김용태 의원)는 쓴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이는 경제민주화와 경제활성화의 상관관계 논쟁으로 이어졌다. 당장 김종인 전 위원장은 각종 토론회에 참석해 “경제민주화를 하지 않으면 창조경제도 불가능하다”며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에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은 “경제민주화 없는 경제활성화는 마약과 같다”고 비유했다. “경제민주화는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는 것이다. 귀찮고 힘들지만 기초체력을 꾸준히 다져놔야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서민과 중산층에서 돈이 돌게 하는 게 중요하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가계부채가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대기업만 앞세운 경제활성화는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이다.”

김남근 참여연대 집행위원장도 “외국 사례를 봐도 부채 주도의 경제활성화는 성공하기 힘들다”며 “가계부채 조정을 통해 가계소득이 증가하도록 하는 새로운 경제민주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 용두사미 억울하게 생각”
이에 대해 여권 인사들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는 여전히 확고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대선 때 박 대통령과 경제민주화 공약 작업을 함께한 새누리당 안종범 의원은 “박 대통령은 용두사미라는 비판에 대해 매우 억울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이 2009년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강조할 때부터 경제민주화에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는 “대기업 총수가 처벌을 받아도 임기 중에는 절대 사면하지 않겠다는 게 대표적 사례”라며 “이를 법으로 만들자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이건 법이 아니라 의지로 하는 거다. 내가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안 의원은 “역대 정권이 개혁에 실패한 것은 여론에 편승해 강하게 주장만 하고 실제 행동은 등한시했기 때문”이라며 “박 대통령은 제도 정비, 이를 집행할 수 있는 행정력 확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등을 삼위일체로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분명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활동했던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도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분명한 의지를 밝힌 만큼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며 “다만 경제상황이 어렵다 보니 급한 것부터 먼저 하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은 실제 국정과제로 제시된 19개 경제민주화 이행법안 중 18개가 본회의를 통과했거나 발의가 완료됐고 나머지 하나도 올 하반기에 발의할 예정이란 점을 들며 “야당의 비판은 정치공세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법안도 애초 공약 중 일부만 담기거나 예외사유를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적잖다. 대기업 총수 일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법안의 경우 총수가 있는 43개 대기업 1519개 계열사 중 확실한 규제 대상은 100여 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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