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60년 회한 담긴 호로비츠 연주에 눈물이…

1986년 4월 20일, 61년 만에 소련으로 돌아간 호로비츠가 연주회 도중 청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P]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89). 이미 많이 알려진 이름이다. 그는 20세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고 화제도 무성했던 피아니스트다. 그만큼 말년까지 영광과 찬사를 누린 연주가를 다시 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명연으로 평가된 곡들과 음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그가 가장 위대하게 보이는 순간은 나의 경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이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을 연주할 때가 아니다. 슈만의 불과 2분30초의 소품 ‘트로이메라이(Träumerei from Kinderzenen)’를 연주할 때 나는 그의 파란 많은 삶과 그를 빛나게 만든 특이한 연주 성향 등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느끼고 읽는다.

슈만 ‘트로이메라이’

이 짧은 소품에는 간단한 개인적 사연도 있다. 음악감상실 ‘돌체’가 아직 문을 열고 있던 1959년, 신입생 환영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시작 전인데 바이올린 연주로 이 곡이 들렸다. “지금 저 곡 이름이 뭐죠?” 내 곁에 앉았던 더벅머리 남학생이 불쑥 물었다. 조금 슬픈 기분을 일으키는 건 알겠는데 나는 제목을 몰랐다. 수치심으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주위에는 같은 신입생 여학생들도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벽촌에서 갓 올라온 나 같은 시골뜨기에게 그걸 물을 게 뭐람? 그 초면의 질문자를 나는 두고두고 원망했다. 슈만의 이 곡은 내가 난생 처음 들어간 음악감상실에서 맨 처음 들었던 음악이었다.

호로비츠는 연주 기량뿐 아니라 묻혔거나 무시되는 작곡가의 작품도 면모를 새롭게 해서 부활시킨 점에서도 전범이 되는 인물이다. 만약 그가 1950년대 이후 미국 무대에서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소품들을 꾸준히 연주하지 않았다면 스크랴빈은 아마 지금 그다지 중요한 작곡가 반열에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크랴빈 작품의 난삽성과 애매한 표정들을 극복하기 위해 셈여림이나 템포 변화를 악보 지시 이상으로 크게 하고, 특정 패시지를 대담하게 과장해 작품의 공감도를 크게 높였다.

이탈리아 태생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작곡가 클레멘티(1752~1832)는 베토벤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에 크게 영향을 미친 작곡가인데, 완전히 묻혀 있던 그의 작품 역시 호로비츠의 세심한 관심과 열정에 의해 현대 청중 앞에 되살아났다.

DG에서 발매한 실황음반.
쳄발로 작품의 한계에 머물던 스카를라티의 명품들을 현대 피아노로 되살린 주역도 호로비츠다. 내가 스카를라티의 매력에 빠지고 스크랴빈에 눈길을 보내게 된 것도 호로비츠 연주를 들은 이후였다. 그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연주가 너무 멋지고 대단해 막상 명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작곡가의 연주 음반 발매를 10년이나 늦췄다는 일화도 있다.

1986년 봄, 나는 신문에서 호로비츠의 모스크바 연주회에 관한 기사를 읽고 어떻게 하면 그 비디오를 구해 볼까 고심했다. 수교 이전이라 현지 참관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다. 호로비츠는 1925년 22세의 파란 나이에 독일 연주를 간다는 핑계로 6개월 비자를 얻어 국경 초소를 통과해 조국을 등졌다.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 덕분에 1986년 연주회를 마련하고 조국땅을 밟게 되었다. 그는 비자 기간을 무려 60년이나 어긴 셈이다. 그러나 고국 청중들은 그를 뜨겁게 받아들이고 열광적인 갈채를 보냈다. 83세 노인 같지 않게 혼신의 힘을 기울인 그 연주는 여전히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났다. 파란의 역정을 거쳐왔다는 점에서 청중들도 연주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국내에도 실황 연주 음반이 발매돼 연주는 들었지만 역시 현장의 그림이 아쉬웠다. 우연히 피아니스트 S씨를 만나 비디오를 빌릴 수 있었다. 나는 그걸 열 개 가량 복사해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다음은 나처럼 현장에 있지 않고 화면으로 그 무대를 감상한 뉴욕 칼럼니스트 앤드루 루리의 짤막한 논평이다.

“(중략)… 내 눈에 고인 눈물의 의미를 파악하는 순간 카메라는 건반 위 호로비츠 손을 떠나 객석에 앉아 있는 한 러시아 청중 얼굴로 옮겨갔다. 그는 약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는데 이 중년 남자의 뺨에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 뺨에서 흘러내린 눈물과 같은 것이었다.”

그 순간이란 호로비츠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치던 순간이었다. 나도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의 의미가 뭘까? 러시아 중년 남자와 미국 저널리스트, 그리고 아마도 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극동 한 모퉁이의 사내가 동시에 흘린 눈물의 의미는 뭘까? 그것은 60년의 시간 동안 쌓인 슬픔과 고난, 그 회한(悔恨)을 반추하고 음미하고 스스로 위안을 구한 자긍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연주장에 있는 많은 러시아 청중들 표정을 보더라도 ‘트로이메라이’는 단연코 그 무대의 하이라이트였다.

허름한 스웨터 차림의 한 할머니, 우리로 말하면 구멍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을 법한 할머니가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소녀처럼 들뜬 표정으로 하던 말이 떠오른다. 서울의 어느 음악회에 가 봐도 이렇게 구차한 행색으로 오는 관객은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오랫동안 호로비츠 연주회에 가는 꿈을 꾸었어요. 이제 내 꿈이 실현된 겁니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