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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노"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

[일러스트=강일구]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1891년 5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사촌인 그리스 왕자와 일본을 방문했다. 인력거를 타고 교토로 향하던 그는 노상에서 참변을 당한다. 경비를 서던 쓰다 산조(津田三?)란 일본 경관이 암살자로 돌변, 머리를 칼로 내리친 것이다. 죽진 않았지만 심한 출혈과 함께 큰 상처를 입었다.



 ‘러시아가 보복할 것’이란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에 난리가 났다. 천황이 도쿄에서 한걸음에 오사카 병원으로 달려갔으며 전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수많은 일본인이 신사로 몰려가 완쾌를 빌었고 1만 통의 위문편지가 답지했다. 범인의 고향 가네야마에선 ‘쓰다’나 ‘산조’란 이름은 못 쓰게 하는 조례가 통과됐다. 심지어 한 20대 이혼녀는 ‘죽음으로 사죄한다’며 자살한다. 이런 극성 덕인지 러시아는 불문에 부쳤다.



 하나 황태자는 죽을 때까지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멸시한다. 러일전쟁 때 일본을 결딴내려 했던 니콜라이 2세가 바로 그였다. 양국 간 악연은 1904년 러일전쟁으로 더 나빠진다. 일본은 이겼지만 러시아의 3배에 달하는 11만여 명이 전사했다. 일본의 반러 감정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극에 달한다. 소련이 종전 6일 전 불가침조약을 깨고 일본 점령하의 만주를 공격한 것이다. 영토분쟁 중인 쿠릴열도 4개 섬도 이때 빼앗겼다. 자연 중·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2~3년 전까지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늘 러시아였다.



 이런 구원 탓인지 최근 일본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불붙은 러시아 응징에 적극적이다. 지난 3월 러시아와의 각종 협상을 끊은 데 이어 지난달 29일엔 정부 관계자 23명의 입국을 금지했다. 여기에다 대형 은행들도 러시아와의 거래를 끊는 등 일본 재계까지 거들고 나섰다. 일본의 민(民)·관(官)이 손발을 척척 맞추며 도와주니 러시아와 척진 미국으로선 얼마나 기특하고 귀엽겠는가.



 동북아 내 미국의 핵심 동맹국은 한국과 일본이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면 한국에도 묵직한 압력이 들어올 공산이 크다. 지난번 이란 제재 때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무조건 이들과 스크럼을 짜야 하나. 한국에 실리는 러시아의 무게는 일본과 견줄 수 없다. 2012년 일본의 무역의존도는 28%. 반면 한국은 94%를 넘었다. 러시아와의 경제 교류를 줄일 경우 한국이 받을 타격이 훨씬 크다는 뜻이다.



 게다가 최대 무역 파트너였던 유럽에서 벽을 쌓자 러시아는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부의 부흥을 꾀하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더더욱 동아시아와의 협력을 꾀할 처지에 몰린 거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온 한 인사가 전하는 그곳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인구 60만의 이곳에 200만 명은 너끈히 살게 도로를 까느라 망치 소리가 요란하다”고 한다. 이뿐인가. 박근혜 정부는 부산에서 유럽까지 철로로 연결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꿈꾼다. 이런 원대한 계획이 미국의 견제로 물거품이 되면 얼마나 큰 손실인가.



 그간의 이란 제재 동참 때에도 한국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중국 봉쇄 의도가 역력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도 실익이 없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가입하려 한다. 이 모두 미국을 배려한 조치다.



 그런데도 워싱턴에선 한국이 아무 보답도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모양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앞둔 지난달 23일 파이낸셜타임스에 게재된 미 보수파의 기고문엔 그런 불만이 노골적으로 배어 있다. ‘오바마의 아시아 동맹국들은 보답해야 한다’는 이 기사에서 전 미 상무부 고문이었던 필자는 “아시아 국가들이 보호주의와 환율 조작을 통해 엄청난 대미 흑자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러니 오바마는 이들 나라에 미국을 위해 무얼 해 주겠느냐고 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나 따져 보자. 미국 측 적자가 는 게 불공정 무역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 기업들의 노력 부족 탓인지. 자신들의 적자가 큰 폭으로 늘면 불공정 무역이라고 몰아붙이는 게 미국의 특기였다. 1980년대 한참 일본이 잘나갈 때도 미국은 천문학적 무역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 곳곳에서 일제 차를 쇠망치로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그때 일본 측이 항의했던 게 미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자세였다. 단적인 예가 냉장고였다. 일본 집은 손바닥만 한데 미 회사들은 초대형 냉장고만을 팔려 한다는 비판이었다.



 지금의 미 업체를 봐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해외시장에 규제가 있으면 맞출 궁리는커녕 그저 철폐하라고 아우성이다. 이번에 오바마가 한국에 와서 언급한 ‘저탄소차 협력금제’가 딱 그 케이스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차는 보조금을 주고 많이 내뿜는 차엔 부과금을 매기자는 게 이 제도의 골자다. 유럽에서 온실가스 감축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게 검증된 착한 제도다. 그런데도 미 자동차 업계는 시원치 않은 성능을 개선하려 하지는 않고 다른 나라의 좋은 제도를 없애거나 회피하려 한다. 성능 좋은 유럽차 업체들은 아무 불평이 없다.



 언제까지 끌려다녀야 하나. 자칫하면 러시아와의 거래도 끊으라 할지 모른다. 맹방도 좋지만 불합리한 요구엔 “노(No)”라 할 수 있는 심지 있는 자세가 필요한 때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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