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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업 불법행위 법적 구제제도 뜯어고치자

김재호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
우리 경제는 산업화시대를 넘어 개인의 인격과 창의력을 존중함으로써 성숙한 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선 지 오래이지만 사법 분야는 여전히 산업화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시대에는 기업의 성장을 위해선 근로자나 소비자 개인들의 희생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사고가 지배했다. 그러한 사고가 사법의 영역에도 뿌리를 내려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기업 편향의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의 개인정보 유출이나 결함 있는 제품 판매, 담합, 대형 사고, 지식재산권 침해로 인해 손해를 입은 개인이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너무나 힘든 고비들을 넘어야 한다. 기업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해 입증이 어렵거나 배상액이 턱없이 적다. 사실상 소비자나 개인에게 피해를 감수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최근 특허침해를 어렵게 인정받았는데 배상액은 변호사비용에도 못 미치는 소액이어서 “우리나라에선 특허가 있어도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보도가 나왔다. 예순 넘은 부모가 수술 중 갑자기 사망한 경우 양심적인 변호사라면 소송을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게 맞다. 의료 과오를 입증하는 큰 산을 어렵게 넘어봤자 배상액은 몇천만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법원이 손해배상액을 대폭 인상해야 한다. 얼마 전 한 기업인의 일당 노역액이 5억원이어서 논란이 됐는데, 법원의 사망사고 위자료액 가이드라인은 8000만원에 불과하다. 조금 격하게 얘기하면 누구의 일당은 5억원이고, 누구의 목숨값은 8000만원인 셈이다. 또 2013년 2월 SK커뮤니케이션즈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대해 20만원씩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하급심 판결이 있었다. 기업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지만 손해배상액이 20만원이라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아울러 입증책임을 합리적 수준으로 완화해야 한다. 법원이 입증책임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도 개인의 권리구제를 어렵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개인정보의 수집 및 유출이 모두 기업의 지배영역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함에도 피해자 개인에게 2차 피해의 발생을 입증하라는 것은 과도한 입증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또한 제조물책임소송에서 결함을 확실하게 입증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어렵게 한다.



 미국 법원의 경우 피해자가 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입증책임을 완화해 사실상 ‘자동차에 결함이 없다’는 사실을 자동차 제조회사가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도 미국 등 외국에서 결함으로 인정된 선례가 있고, 기술적으로도 문제점이 있음이 소명된다면 원고가 입증책임을 다했다고 보는 입증책임의 완화를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징벌적 배상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할 필요가 있다. 최근 공정거래법 위반, 주가조작, 인격권 침해, 소비자 피해, 개인정보 침해, 차별로 인한 피해 등을 효과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징벌적 손해배상의 도입 필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주요 카드사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인한 불안감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KT에서 12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KT는 2004년과 2012년에도 개인정보를 해킹당한 전력이 있다. 벌써 세 번째 유출 사고다. 강력한 제재 없이는 기업 스스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와 함께 ‘아미쿠스 브리프(Amicus Brief·법정의견서)’ 제도 도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 제도는 사회적·경제적 사건에 관해 이해관계를 갖는 개인·기관·단체 등이 법원의 허가를 얻거나 법원의 요청에 따라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개인이나 중소기업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이 제도의 활용은 관련 사건에 관한 관심과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단체 등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소송당사자로서 열위에 있는 개인이나 중소기업을 지원할 수 있다. 이 제도의 도입은 각계각층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과격한 시위문화가 사라지고 성숙한 자본주의가 시행착오 없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업의 범죄에 대해 형사처벌 대신에 거액의 벌금과 준법감시시스템 정비를 요구할 수 있는 미국식 불기소 협약(NPA)과 기소연기 협약(DPA)도 검토해볼 만하다. 지난해 3월 도요타사는 미국 법무부에 12억 달러(약 1조3000억원)의 벌금을 내고 급발진 결함 은폐 문제 수사를 끝내기로 합의했는데 이것이 바로 불기소 협약이다.



 법원은 ‘기업이 망한다’는 엄살에 더 이상 겁먹으면 안 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지금은 국민 희생을 통한 기업보호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잃었다. 고객인 개인, 미래 성장동력 제공자로서의 창조적 개인과의 상생을 위해 노력할 때만 기업도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의 행위로 개인이 입은 손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함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비합리적 관행의 타파가 시급하다.



김재호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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