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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NIE] 삼국사기 쓴 김부식은 정말 사대주의자였을까

신·구 세력 간 갈등은 역사의 수레를 밀고 나가는 주 동력이다. 치열한 싸움 이후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기록되기 마련이다. 신·구 세력 대립의 당사자이자, 역사의 기록자로 기억되는 인물이 있다. 남아있는 국내 최고(最古)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다. 김부식이 활동하던 고려 인종 때 집권층은 이른바 ‘문벌 귀족’(대대로 고위 관리를 배출하는 가문)이었다. 그는 수도 개경에 기반한 최대 문벌의 지도자였다. 문벌 세력은 왕권 강화에 위협적이었다. 신진 세력인 묘청은 인종의 호응 속에 수도를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으로 옮기는 개혁을 단행하려 했으나 김부식은 이를 좌절시켰다. 하지만 문벌 귀족을 못마땅해 하던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내쫓았다. 교과서와 신문이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글=성시윤 기자 자문=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김부식(1075~1151)  고려 중기 유학자이며 역사가·정치가. 글 솜씨 좋기로 유명해 스물두 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했다. 인종의 외척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리고 도참사상을 수용한 승려 묘청이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겨려다 좌절하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했고, 예종실록과 인종실록도 편찬했다. 송나라 사신으로 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얻어온 것이 후일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유교적 합리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 속 라이벌, 묘청



 김부식의 정치적 라이벌은 묘청이었다. 김부식-묘청의 숙명적 관계를 부각한 건 단재 신채호(1880~1936)다.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1000년 이래 제1 대사건’으로 평가했다. 미래엔·리베르·금성출판사가 신채호의 이같은 언급을 인용하고 있다. 신채호는 “조선 근세에 종교·학술·정치·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것은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국풍파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적 사상 대 보수적 사상의 싸움으로 평가한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신채호보다는 좀더 중립적 관점에서 둘의 관계를 설명한다. 리베르·지학사·미래엔 등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으로 설명한다.



 김부식-묘청 간 대립의 뿌리는 문벌 귀족 사회의 부작용에 있었다. 지학사는 고려 성종 이후로 중앙 관료로 진출한 지방호족, 신라 6두품 계열의 유학자를 중심으로 문벌 귀족이 형성됐다고 적고 있다. 대표적 가문으로는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경원 이씨, 최충으로 대표되는 해주 최씨, 김부식이 속한 경주 김씨 등이다.



 문벌 귀족은 음서제(공신 혹은 5품 이상 고위 관리 자손을 채용하는 제도)와 과거를 통해 관직을 차지했다. 공음전(5품 이상 관료에게 지급한 토지로 세습이 가능) 덕분에 경제력도 대대로 유지했다. 더불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서도 세력을 키웠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자겸이었다. 인종의 외조부이기도 한 그는 두 딸을 인종의 비로 앉힐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인종이 왕권 회복을 내세워 이자겸을 쫓아내려 하자 이자겸은 난(1126년)을 일으켰다. 김부식이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자 김부식 문벌의 입지는 한층 강화됐고 문벌 귀족 간 권력 쟁탈전이 더욱 심해졌다.



 결국 인종은 서경 출신 묘청·정지상을 기용해 서경 천도를 비롯한 정치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지학사는 “외척과 문벌 귀족 횡포를 막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한 인종이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여러 차례 행차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인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라’는 묘청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김부식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난을 진압했다. 이후 신분을 중시하는 귀족적 성향이 강화됐으며, 결국 무신 정변이 일어나 문벌 귀족 세력은 몰락했다고 비상교육은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 삼국사기 편찬



 김부식이 개인적으로 『삼국사기』를 쓴 건 아니다. 인종의 명을 받아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역사를 편찬했다. 천재교육은 “고려는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를 바탕으로 초기부터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불 탔다”며 역사서 편찬의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지학사는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고 했다”고 적었다. 『삼국사기』 편찬에 관료 여럿이 투입됐고, 김부식은 편찬 전반을 총괄했다.



 교과서 대부분은 김부식의 정치적 성향을 감안해 『삼국사기』가 채택한 사관을 ‘유교적 합리주의’로 부른다. 『삼국사기』가 기전체(제왕·제후·인물·주제·연표 등으로 구성된 역사 서술 방식)로 쓰여진 것도 이런 사관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비상교육은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 역사의식을 표출하였다”고 평가한다. 문벌 귀족은 고려 정통성의 뿌리를 고구려나 신라에서 찾았는데, 김부식이 속한 경주 김씨는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학사 역시 “고려 중기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이 약해지고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삼국사기』는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외의 교과서도 『삼국사기』가 “신라 계승 의식을 반영”(리베르)했다거나 “유교적 합리주의적 사관(두산동아)을 반영”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미래엔은 ‘『삼국사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서 다른 해석을 소개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을 마치고 인종에게 바친 글 일부를 싣고 있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이 중국의 경전과 역사에는 능통하나 우리나라 역사는 잘 알지 못하니 걱정스러운 일”이라는 인종의 걱정이 언급돼 있다. 그러면서 “중국 역사서에 삼국의 기록이 있으나 자세하지 않고, 예부터 전해 오던 고기(古記) 내용은 빠진 내용이 많아 후대에 교훈을 주기 어렵다. 이에 후대에 남겨줄 역사서를 만들어야겠다”는 인종의 지시도 옮겨 적었다. 김부식이 경주 출신 문벌 귀족으로서 유교 이념으로 지배 질서를 재정립하고 금 나라와 온건한 대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점을 들어 『삼국사기』가 사대주의 경향을 지닌 신라 중심 역사서라는 데는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삼국 고유 기록을 존중했고, 고구려 주몽이나 신라 박혁거세 건국 신화도 실었으며, 유교적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실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며 후하게 평가하고 있다. 이 교과서는 “이처럼 『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역사를 동등하게 다루고, 중국의 역사와 대등하게 인식했던 흔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적이며 신라중심적이라는 평가는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



QR코드를 찍으면 김부식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발견되는 남성 우월적인 인식 탓에 최근 언론에서는 비판적 시각이 적지 않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혹평했다…. 선덕여왕 때 나라가 망하기는커녕 비주류인 김춘추·김유신을 발탁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중앙일보 2012년 1월 18일자 ‘여인천하’). 아울러 『삼국사기』가 백제를 신라·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했음도 지적한다. “백제는 해양제국을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그려진 백제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약소국으로 묘사돼 있다.” (중앙일보 2013년 11월 26일자,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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