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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피케티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데이비드 브룩스
NYT 칼럼니스트
빈곤층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좌경화한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미국 민주당은 빈곤층보다 중산층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해 왔다. 반면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Occupy Wall Street) 등 진보적 정치운동은 상위 1%를 겨냥했다. 현재의 진보 영화나 서적은 과거 『분노의 포도』나 『다른 반쪽 삶의 실상(How the Other Half Lives)』 같은 책들이 밑바닥 삶을 다룬 것과 달리 상류사회의 과두지배와 음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연한 현상이다. 현대 좌파를 이끄는 이들은 주로 해안 도시나 그 주변에 거주하는 학자와 활동가, 언론인, 예술인 등 전문직이다.



 당신이 대도시의 젊은 전문직이라면 불평등과 맞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가장 강렬히 경험하는 불평등은 빈곤층의 불평등이 아니라 부유층의 격차다. 당신이 기금 마련 파티나 학교 행사를 가면 헤지펀드나 사모펀드 투자자들에게 둘러싸인다. 당신은 파티에서 인기 있는 사람이지만 당신의 아파트는 그들의 주방보다 작다. 당신은 등록금을 내느라 허덕이는데 그들의 자녀는 주말이면 스키를 타러 간다. 당신은 우체국에서 줄을 서지만 그들에겐 잡무를 대신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상류사회에서 부가 넘쳐나는 걸 똑똑히 지켜본다. 당신의 연구 프로젝트나 전시회에 돈을 대줄 소수의 상류층과 그들이 만든 재단에 아첨을 떨며 살아야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대로 ‘문화자본’과 ‘금융자본’이 충돌하는 계급 갈등이 무르익고 있는 중이다. 이 난투장으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가 들어온다. 그는 저서 『21세기 자본론』에서 불평등의 진정한 원인이 인적자본이 아닌 금융자본의 격차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 불평등을 초래하는 건 자녀에게 온갖 편의를 안겨 주면서 일류대학에 보내려는 젊은 전문직 계층이 아니라 헤지펀드 재벌이라고 책은 주장한다. 이 책은 ‘비틀스 열광’에 빗대질 만큼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책 내용은 아주 좋고 흥미롭지만 눈에 띄는 약점도 있다. 경제학자들은 미래 예측에 별 소질이 없는데도 피케티는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음 세기를 예측한다. 그의 예측은 다음과 같다. 혁신이 활발히 일어나는 것 같지만 100년간 성장은 둔화된다. 자본 공급이 증가하면서 그 수익률이 낮아져도 자본 수익의 절대적인 액수는 커질 것이다. 과거의 대부호가 해체되고 빌 게이츠를 비롯한 부호들이 사회 환원을 많이 한다고 해도, 부는 특정 가문에 더욱 집중된다. 인간은 군상으로 다뤄지고, 개인의 선택에 대한 논의는 줄어든다.



 책을 통해 전하려는 그의 정치적 어젠다는 타깃 독자층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인적자본보다 금융자본을 통한 불평등을 강조한 이들은 지금껏 문제만 부각시켰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제안을 한다. 글로벌 부유세를 신설하자는 것이다. 피케티는 전 세계의 모든 정부, 아니 최소한 주요국 정부라도 서로 힘을 합쳐 거대 부호를 찾아내 이들에게 누진세를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전문직의 고소득에 대한 세금 인상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없는 투자자본 과세를 제안할 뿐이다. 하지만 다주택을 소유한 금융자본가들이 납세를 위해 맨해튼이나 샌프란시스코만 일대의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으면 부동산 시장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



 글로벌 부유세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정치 발상이다. 그 이유는 피케티도 알고 있다. 좌파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끊긴 다리 위로 행진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은 진보가 자신의 세계관과 어젠다를 발견한 순간이다. 이런 진보의 움직임은 중도와 보수로 분류된 나머지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중도와 보수는 부의 편중이 가져오는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고는 피케티의 주장대로 성장과 저축, 투자를 벌하기보다 이를 보상하는 대조적인 어젠다를 강조해야 한다. 자본세가 아닌 누진소비세를 지지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상류층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적자본 개혁을 통해 빈곤층을 끌어올리는 게 불평등 완화에 더 효과적이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고 강조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함께 위로 올라가는 것을 통해 성난 진보주의에 맞서야 한다.



 피케티의 책에 대한 열렬한 반응은 놀라운 문화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진정한 기회의 확대보다 지식층 사이의 계급 대립에 더 집중한다. 물론 이런 해석 또한 나의 편견일 수 있다. 문화현상을 분석할 때면 나 또한 피케티처럼 준(準)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 NYT 칼럼니스트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4월 2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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