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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눈을 떠보니 세상이 달라 보일 때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 1894~1961) 젊은 시절 미국 최대의 탐정회사인 핑커턴에서 일했으며, 건강 문제로 그만둔 뒤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범죄 세계에 대한 실제 지식과 간결한 문체를 특징으로 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영화 ‘자전거 도둑’으로 유명한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은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자신’이라는 한 가지 역할만은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달리 말하면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하루하루의 일상인데, 소설 속 주인공의 행동에 공감하다가도 극적인 순간 멋쩍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과연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The Maltese Falcon)』를 처음 읽었을 때 내가 꼭 그랬다. 주인공 샘 스페이드가 자신에게 애원하며 매달리는 브리지드 오쇼네시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자. 스페이드는 강인하고 남성적이지만 돈과 여인을 밝히는 속물 탐정이고, 브리지드는 몰타의 매를 손에 넣기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으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팜므파탈이다.

브리지드는 사랑에 호소한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스페이드는 부드럽게 말한다. “사랑스러운 아가씨! 운이 좋으면 20년 후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때 나한테 돌아와요.” 그러고는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어루만지며 덧붙인다. “이 가녀린 목에 교수형 밧줄이 걸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번 애원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이미 깊은 관계를 맺은 사이다. 하지만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당신을 넘길 생각이에요.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20년 뒤에는 나올 거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여자예요. 나는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만약 당신이 교수형을 당한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입에 입술을 대고 끌어안지만, 그는 이를 다문 채 그 사이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작품은 탐정 소설을 정통 문학의 반열로 끌어올린 걸작으로 평가받지만 사실 줄거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타래처럼 얽힌 사건의 진상은 무엇이며 범인은 누구인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따로 있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보자.

스페이드는 자신이 몇 해 전 의뢰를 받아 플릿크래프트란 인물을 찾아냈는데, 그때 겪었던 일을 브리지드에게 밑도 끝도 없이 들려준다. 손을 펴니 주먹이 사라진 것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춘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남자한테 일어난 일은 이런 겁니다.”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유복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플릿크래프트는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공사장 앞을 지나는데 10층 정도 높이에서 철제 빔이 떨어져 바로 앞의 보도가 박살이 난다. 깨진 보도 조각이 튀어올라 그의 뺨을 강타하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당연히 머리가 쭈뼛 섰지만 경악했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어요. 누군가 인생의 어두운 문을 열고 그 안을 보여준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그는 훌륭한 시민이자 좋은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렇게 모범적으로 살아도 어느 날 식당 가는 길에 철제 빔에 맞아 즉사할 수 있다. 죽음이란 이처럼 마구잡이로 찾아오며, 사람은 눈먼 운명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뭔가 깨닫는다. 지금까지 안락하고 확실해 보이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것이 실은 진짜 인생이 아니라 인생 본연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인생을 바꾸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변화의 방법을 찾는다. 난데없는 철제 빔의 추락으로 자기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으니 자기도 난데없이 살던 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모든 것을 남겨둔 채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다. 그러고는 두어 해 동안 정처 없이 떠돌다가 자기가 살던 곳 인근에 정착한다. 첫 부인과 비슷한 두 번째 부인을 얻어 가정을 꾸리고 골프도 다시 시작하고 친구도 새로 사귄다. 예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자신이 두고 떠났던 똑같은 생활로 빠져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 사람은 철제 빔 사건 때문에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빔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빔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에 인생을 맞춘 거죠.”

작품 속에서 사건의 발단이 된 몰타의 매는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전설 속의 보물이지만 결국 가짜로 판명 난다.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 살인극까지 벌어지고 사랑과 배신, 탐욕이 물결쳤던 것이다.

문득 눈을 떠보니 세상이 전혀 달라 보일 때가 있다. 아, 인생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갑작스러운 일탈에의 욕구가 불쑥 솟아오르지만 그렇다고 매일같이 영위하는 안락한 일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없이 소중하면서도 신기루처럼 불안정한 일상, 이 작품에서 언뜻 내비치는 우리 삶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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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