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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아파하고 또 아파하라 … 걸음마를 다시 배우듯

온 국민이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큰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충분히 아파해야 한다. 상처 입은 서로를 어루만지며 다시 살아가야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칼 구스타프 융 지음
김세영 옮김, 부글북스
188쪽, 1만1500원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 지음
김재홍 옮김, 까치
222쪽, 1만1000원

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이은선 옮김, 시공사
287쪽, 9000원

천 년은 족히 되었을 나무 그늘 아래 물끄러미 앉아 쉬어본 적이 있는가. 나무 등걸은 두 팔로 다 안을 수도 없이 우람하고, 가지는 축축 늘어져 거대한 커튼처럼 하늘과 땅에 동시에 드리우는 믿음직한 나무. 그런 나무 그늘에 앉아 등허리를 기대면 내가 얼마나 자그마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내가 작기 때문에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작음을 정직하게 깨닫기에 비로소 겸허해진다. 절망의 문턱에 다다를 때마다 나는 그런 천년 고목 같은 스승들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대지에 제대로 뿌리박지 못한 갈 곳 잃은 묘목 같은 나는 여전히 그런 스승을 기다리고, 꿈꾸고, 의지한다.

 그 첫 번째 스승은 바로 칼 구스타프 융이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에서 융은 현대문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악(惡)으로부터의 도피’를 꼽았다. 각종 대재앙이 닥칠 때마다 현대인들은 편리한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며 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피해왔다는 것이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악과 만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악으로부터 도망칠 것이 아니라 악의 뿌리를 탐구해야 한다. 융은 개인이야말로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주체라고 보았다. 겨우 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통렬한 반성과 냉철한 비판이 모여 세상을 좀 더 낫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엄청나게 소란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익명의 대중성 뒤로 숨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싸워야 할 악의 뿌리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전력투구할 때 구원은 시작될 수 있다.

 노예로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끝내 위대한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에서 ‘나에게 달린 것’과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강조한다. 국적·부모·인종·외모·평판·재산 같은 것들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인데, 사람들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골몰하느라 진정 ‘나에게 달려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나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혜·신념·우정·용기·희망처럼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내면의 가치들이다. 제우스가 나타나 호통을 치더라도 결코 훼방놓을 수 없는 나만의 과업, 그것이 바로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생존경쟁에 시달리며 자기과시와 자기보존 욕구에 찌들어버린 현대인들은 외모와 학벌, 재테크 같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골몰하느라 배려와 공감, 이해와 공존 같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을 외면하기 쉽다. 우리는 위기에 처했을 때야 비로소 명징하게 깨닫는다. 어떤 영광도 인기도 명예도 재산도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큼 소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바꾸기 어려운 외부의 상황에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나 자신의 실천을 모색하는 것. 이렇듯 나로부터 시작되는 자발적 윤리가 구원의 희망이 된다.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신경 쓰느라 진정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을 등한시하는 문화는 결코 서로의 다름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에픽테토스는 사랑 또한 ‘내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있지 않는 것’으로 갈라 보았다. 인간의 참된 가치는 얼마나 사랑을 받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지에 따라 판가름 난다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시험문제를 잘 푸는 기술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했을 때 서로 돕는 법을, 고통에 빠졌을 때 서로 위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어른들 자신도 잘 모른다면, 마치 걸음마를 시작하듯 다시 처음부터 세상 속에 올바르게 발 딛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가진 모든 지혜를 끌어 모아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진다. 지혜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진정 절실한 것은 서로 보듬는 따스한 손길이다. 조앤 디디온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고통에 맞닥뜨렸을 때, 한 작가가 슬픔의 거대한 늪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가슴 아프게 보여준다. 자신의 눈앞에서 손 쓸 틈도 없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던 그녀 곁에는 말없이 그 슬픔의 기나긴 터널을 함께 걸어가 준 친구들이 있었다. 조앤 디디온은 슬픔이 두려워 슬픔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슬픔 속으로 온몸을 던져 슬픔과 뒹굴고, 슬픔과 사투를 벌이고, 마침내 슬픔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발견했다.

 융은 말했다. 아픈 상처를 지닌 사람만이 또 다른 아픔을 가진 이를 치유할 수 있다고. 우리의 아픔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아직 실낱같이 남아 있는 희망의 뜨거운 증거일 것이다. 충격으로부터의 격리만이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차라리 마음껏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서로를 지켜보고 어루만져주는 것. 나아가 ‘우리에게 아직 달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하는 냉철한 이성이야말로 구원의 가능성이 아닐까. 비리와 부패에 찌든 사회에서는 ‘나에게 달려있는 것’조차 ‘내 소관이 아니다’라며 회피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조차 끝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만드는 용기와 공감의 힘이야말로 구원의 마지막 희망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써오고 있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등을 썼다.

슬픔에 빠진 이들 어떻게 위로해줄까 …

◆사랑하는 이를 잃고 충격에 빠진 사람을 홀로 내버려두지 말아라. 사실 많은 경우 우리는 장례식에만 참석하고 그 이후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는다. 그래서 슬픔에 잠긴 가족들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공허감이나 핸디캡을 안고 살아가도록 내버려둔다. 바로 이 때가 그들에게 도움이나 배려가 가장 필요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 가장 절실한 시기인데도 말이다.

 ◆어설픈 위로의 말을 삼가라. 어설픈 위로는 당신이 어느 정도로 상대방의 느낌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 보여줄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 슬픈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정리되겠지”, “그 사람은 지상에서 자신의 시간이 끝난 거야”, “새로 임신할 생각을 해. 아이를 하나 낳으면 다 잊어버리게 될 거야….” 이런 말들은 금지 목록에 포함시켜야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옆에 있어 줘라. 함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무언가 꼭 말을 하고 싶다면 진심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고 있어(혹은 내가 너랑 함께 있어 줄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솔직하고 진실한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의 톤이나 미소, 눈길 등에서 진심이 아님이 드러나 상대방이 알아차리게 되고, 그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프랑스 심리학자 안 슈창베르제가 쓴 『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민음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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