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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화창한 봄날의 '무심 죄'

신아연
작가
花開昨夜雨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 오늘 아침 바람에 지고 있네.



 可憐一春事 가련토다 한낱 봄날의 일이라니



 往來風雨中 비와 바람 사이에 오가는구나.



 조선 시대 문인 송한필의 시, 우음(偶吟) 이다.



 두보(712~770)의 곡강(曲江)에는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은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 바람에 날리는 만 점 꽃잎이 정녕 사람을 시름 젖게 하네.



 라는 행이 있다.



 때이른 데다 순서도 없이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뒤미처 조팝나무 꽃까지 한꺼번에 피어 올라 시끌벅적, 뒤죽박죽, 요란법석을 떨었던 꽃 잔치. 뭐가 그리 급했던가, 세상에 나오자 바로 난리를 만나 비바람, 저온에 속절없이 꽃잎을 떨구던 그것들이 어찌나 애처롭고 애잔하던지, 뒤늦은 시름의 소회를 위의 두 시에 얹는다.



 호주 이민 후 22년 만에 맞이한 한국의 봄은 가지가 휘어질 듯 흔전만전한 꽃들의 함성과 난분분 난분분 내리던 꽃비로 각인됐다. 만발한 기화요초 아래 한바탕 꿈을 꾼 듯하지만 다행히도 봄볕은 여전하고 라일락 훈향에 코를 벌름이며 되찾은 여유가 호주에서 있었던 오래전 일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쓴 글이다.



 아이들이 네댓 살 무렵이던 어느 해 성탄 전야, 동네 공원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어둠이 드리운 밤하늘로 ‘슝~’ 소리와 함께 첫 발이 솟아올랐다. 이어서 연발로 ‘펑펑’ 터지는 폭죽, 갖가지 무늬가 명멸할 때마다 구경꾼들의 탄성도 높낮이를 달리하며 함께 터졌다.



 나 역시 두 아이를 양팔에 감싸 안고 고개를 한껏 젖힌 채 홀린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데, 지금껏 우리 앞에서 캐럴을 함께 부르던 아가씨가 슬그머니 일어나 무리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에서 자리를 뜨는 것이 의아해 유심히 살피니 앞이 안 보이는 아가씨였다. 인도견과 함께 조심스레 발길을 돌리는 맹인. 현란하고 은성한 불꽃 잔치는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겐 공포스러운 굉음의 연발에 다름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린다는 평소의 입바른 소리가 얼마나 맹랑하고 허망하던지, 참으로 미안하고 참담했다.



 2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지만 올해 한국의 ‘봄꽃놀이’에, 그해 호주의 ‘불꽃놀이’가 중첩되면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꽃이 폈네, 마네, 비바람에 지네 마네’ 하며 모두가 수선을 피우고 호들갑을 떨 때 앞 못 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봄꽃’은 ‘불꽃’처럼 굉음을 내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온 나라가 울긋불긋 꽃 잔치에, 벙글벙글 꽃 축제에 취해 있는 때 그들의 봄은 어떤 빛깔로 찾아오는지, 그저 여전히 무채색인지 송구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우리는 대체로 선량하지만 이따금 ‘무심 죄’를 짓는다.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앞에서 꽃 타령을 하는 것도 그렇고,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건강하기만 하면 재기할 수 있다’고 건네는 희망의 언어가 건강마저 잃은 사람에겐 벼랑 끝에서 듣는 절망의 말일 때가 있다. 어려워도 가족이 있기에 힘이 난다는 말이 가족 없는 사람의 기를 무참히 꺾기도 한다. ‘무심코’ 짓는 ‘무심 죄’ 탓이다.



 그러기에 마땅한 신이 없다고 투덜대기 전에 두 발이 없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자기 처지를 놓고 불평이라도 덜 해야 할 것이다. 빌어먹지 못하는 사람에 비하면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다행이라고 하듯이.



 상념에 젖어 만 점 벚꽃 잎 소복이 떨어진 길을 거닐며, 강아지 솜털같이 복슬복슬 보드라운 이런 것들이 폈었노라고,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의 손을 끌어다 만져보게 할 양으로, 짐짓 눈을 감고 앉아 가만히 바닥을 쓸어본다.



신아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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