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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방통 식재료 ② 프랑스 가정식으로 탄생한 토종닭·취나물·국화

서울 방배동에 있는 쿠킹 스튜디오 ‘르 셰프 블루’에서 수강생들이 로랭 달레 셰프에게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있다. 왼쪽부터 로랭 달레, 임근영·김소예씨.


사랑엔 국경이 없다지만 식재료엔 국경이 있다.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르 셰프 블루’를 운영하는 부부 이야기다. 프랑스인 셰프 로랭 달레(Laurent Dallet)와 그의 아내 이미령 대표는 런던 유학 시절 만나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쳤으니, 바로 식재료 때문이었다. 한국의 식재료로는 원하는 요리를 마음껏 할 수 없었던 로랭은 슬럼프에 빠졌고, 이 대표와 갈등을 빚었다. 이 대표를 두고 프랑스로 떠난 로랭은 3주 만에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왔다. 인천공항을 다시 밟은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곳 식재료를 열심히 공부해 보겠노라고. 그리고 찾아냈다. 한국 식재료와 프랑스 요리의 찰떡 궁합을.

글=김경진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방배동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는 ‘르 셰프 블루’는 레스토랑이길 거부하는 곳이다. 부부는 이곳을 ‘쿠킹 스튜디오’라고 부른다. 로랭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수강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장소에 가깝다는 의미다. 테이블도 하나뿐이다. 하루에 한 팀(최대 12명)만 받는다. 게다가 월요일과 목요일은 요리 강습으로 식사 예약이 불가능하다. 지난 10일 저녁 회사 동료인 임근영(32)·김소예(30)씨는 퇴근 후 이곳을 찾았다. 로랭에게 요리도 배우고 식사까지 하는 데 든 비용은 1인당 10만원. 똑같은 메뉴로 식사만 할 경우는 7만원이니 강습비가 3만원에 불과한 셈이다.

음식값이 강습비보다 비싼 건 식재료 때문이다. 음식값의 절반가량을 식재료 구입비에 쓴다고 한다. 돈이 적게 남더라도 식재료만큼은 좋은 것을 쓰겠다는 로랭의 철학 때문이다. 손님을 많이 받지 않는 이유도 요리의 질을 생각해서란다. 대량으로 만들면 그만큼 맛과 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로랭의 깐깐함 때문에 부부는 한때 이혼 위기까지 갔다.

사연은 이렇다. 프랑스판 ‘신이 내린 직장’인 브이그텔레콤을 다니던 로랭은 11개월간의 안식년을 맞아 미국 뉴욕의 국제요리학교(ICC)에서 요리사 자격증을 땄다(ICC에선 6개월이면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35세 늦깎이로 요리의 세계에 입문한 그는 회사에 창업휴가(2년)를 내고 뉴욕 주재 프랑스 영사관의 ‘수 셰프(부주방장)’로 근무했다. 이 대표 역시 함께 근무하던 브이그텔레콤에 사표를 던지고 푸드 칼럼니스트로 직업을 바꿨다.

이곳에서 6년간 일하며 요리에 자신감이 붙은 로랭은 한국행을 결심했다. 아내의 고향에서 자신만의 요리 세계를 펼쳐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로랭은 “처음엔 감자 하나, 양파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온통 딱 한 가지 품종뿐이었다. ‘감자 생산자가 1명뿐인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고, 잘생긴 놈도 있고 못생긴 놈도 있어야 자연스러운데, 품종과 모양·크기가 다 똑같아서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맛의 차별점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 대표도 당시를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남편이)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마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슬럼프에 빠진 로랭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프랑스로 돌아가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길 권했다. 떠났던 로랭은 다시 돌아왔고, 이때부터 두 사람의 식재료 찾기 기행이 시작됐다. 둘은 함께 가락시장·노량진시장·마장축산물시장·경동시장 등을 쏘다니며 식재료 연구에 나섰다.

그러다 부부는 전북 진안의 한 블루베리 농장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 대표가 페이스북에 제대로 된 상추를 찾아 볼 수 없다는 하소연을 올렸는데 이를 본 ‘깊은샘블루베리농장’의 김영일 대표가 가게를 찾아온 것이다. 부부는 전북 진안으로 내려가 직접 확인에 들어갔다. 블루베리 농장에선 블루베리와 멸치·쌀겨·가지 등을 함께 간 사료를 먹은 닭들이 자유롭게 뛰놀고 있었다. 내장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담아 주는 것도 프랑스와 닮아 있었다. 닭의 볏까지 먹는 프랑스에선 닭의 간으로 샐러드를 만들기도 하는데, 한국 시장에선 닭 몸통밖에 구할 수 없어 아쉬웠던 그였다. 여기에 유기농 장터와 직거래 등 식재료를 구하는 통로를 넓혀 나가면서 요리의 즐거움을 되찾았다고 한다.

로랭에 따르면 토종닭은 프랑스 닭보다 조금 더 질기고 퍽퍽하다. 프랑스에선 도축 전 2주에서 20일 정도 닭들을 쉬게 하는데 토종닭은 끝까지 ‘자유롭게’ 뛰놀다 가기 때문이란다. 토종닭의 질긴 맛을 없애기 위해 로랭은 토막낸 닭에 디종 머스터드(겨자소스)와 소금·후추로 간을 한 뒤 허브·마늘·올리브·양파·화이트 와인에 재운다. 몇 시간 동안 냉장고에서 숙성시킨 닭을 올리브 오일을 두른 뜨거운 팬에다 구운 뒤 재울 때 사용한 양념을 넣고 냄비에 넣어 15분 동안 익히면 프랑스식 닭요리가 완성된다.

로랭에게 있어 한국 적응의 첫 단계가 프랑스와 유사한 식재료를 찾는 일이었다면 다음 단계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식재료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먹는 나물 요리에 주목했다. 한국인들은 채소를 주로 나물로 만들어 먹는데 이게 프랑스의 시금치 요리와 유사해 보였다. 로랭은 취나물·유채에다 버터와 마늘, 샬롯(양파)을 넣고 약한 불에 5분 정도 익힌 뒤 물기를 짜냈다.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의 나물이지만 먹어보면 참기름 맛 대신 버터 맛이 난다. 여기에 생크림과 익힌 나물을 믹서에 넣고 간 뒤 계란 프라이와 치즈 가루, 잘게 썬 베이컨을 뿌리고 180도의 오븐에서 5분간 굽는다. 이렇게 탄생한 나물 요리는 시금치로 만든 것보다 씹는 맛과 향이 강하다.

경동시장에서 사온 국화는 ‘크렘 브륄레’란 디저트에 접목했다.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에서 주인공 아멜리에(오드리 토투)가 숟가락으로 깨뜨려 먹었던 바로 그 디저트다. 로랭은 여기에 국화향을 입혔다. 우유에 생크림과 토종꿀, 말린 국화를 넣어 끓인 뒤 설탕과 계란 노른자를 함께 섞는다. 이를 작은 용기에 담아 100도 오븐에서 30분간 익혀 준다. 다 익으면 냉장고에 2시간 정도 보관한 후 설탕을 뿌리고 토치 불로 표면을 그을려 준다. 표면에선 ‘달고나’ 향이 나고, 속살을 한 입 떠넘기면 국화꽃 향기가 피어 오른다.

식사 준비를 마친 로랭은 요리에서 꼭 필요한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릴 수 있어야 하며, 새로운 ‘이노베이션(혁신)’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때 이혼 위기로까지 몰고 간 애물단지 식재료가 어느새 로랭에게 있어 새로운 요리를 창조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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