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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뽀얀 소금꽃, 싱그런 청보리 … 이렇게 고울수가



서해안의 봄은 꽃이 빚어내는 화려한 색깔이라기보다 생명이 꿈틀대는 기운에 더 가깝다. 서해안에서는 염부가 하얀 천일염을 거둬들이고, 연둣빛 청보리가 들판을 채울 때쯤 돼야 진짜 봄이 시작된다. 봄에 어디 꽃만 곱고 아름다울까. 부안의 천일염, 고창의 청보리밭도 엄연한 봄의 증거요 고운 얼굴이었다.

글=백종현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연둣빛으로 곱게 물든 고창 학원농장 청보리밭

부안의 봄은 뽀얀 하양

전북 부안의 봄은 바다로부터 찾아온다. 서해안에 불쑥 삐져나온 부안의 변산반도에서는 3월을 넘겨야 봄이 기지개를 켠다. 봄꽃이야 진즉 피었으되, 연안에 보금자리를 튼 사람들은 해산물과 천일염이 바다를 차고 올라와야 진짜 봄이 왔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4월 중턱의 부안은 곳곳이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군내 최대 장터인 부안상설시장엔 주꾸미·게·갑오징어 등 제철 맞은 해산물이 소쿠리마다 그득 쌓여있었다. 시장 곳곳의 횟집마다 주꾸미 샤브샤브 익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호남에서는 예부터 봄에는 변산이, 가을에는 내장산이 아름답다고 하여 ‘춘변산 추내장’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안 어디서나 병풍 노릇을 하는 변산에도 신록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륙보다 개화 시기가 늦은 산벚나무가 듬성듬성 꽃을 피워 구름처럼 변산을 장식했다.

본격적으로 봄을 맞기 위해 부안군 진서면 곰소리 곰소염전에도 발을 댔다. 뒤늦은 봄을 어서 마중이라도 하려는 듯 소금밭 염부들의 하루는 동트기 전부터 시작됐다.


“어르신, 날이 아직 찬데 일찍 나오셨네요?”

경력도 이름도 높아 염전에서 ‘장군’으로 통하는 허중장(71) 염부가 염전에 일천한 기자를 한 수 가르쳤다.

“해가 올라오기 전에 소금을 거둬놔야 한낮의 햇빛이 또 다른 소금을 만들어 주지. 어디 염부가 팔자 좋게 잠을 자!”

천일염은 보통 3월 말부터 10월까지 만들어진다. 염전은 겨우내 잠을 잔다. 햇빛이 적당히 기온을 올리고, 바람이 바닷물을 날려보내는 봄이 돼서야 염전에 짠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생산량은 5~6월이 가장 많다. 여름엔 햇빛은 강해도 비가 잦아 소금을 거두지 못하는 날이 많다. 능숙한 염부의 대패질(고무래로 소금을 모으는 일)에 염전에 금세 소금이 수북하게 쌓였다.

곰소염전은 천일염 가운데서도 명품 취급을 받는다. 짜지 않고 맛이 좋아 다른 지역에서 나는 천일염보다 2~3배 더 비싼 값에 팔린다. 천일염에 혀끝을 대보았다. 과연 달다고 느껴질 만큼 짠맛에 거부감이 덜했다.

곰소염전에서는 염부도 한 명 한 명이 중소기업가이자 장인이다. 천일염의 수익을 회사와 반반으로 나눠 가져 양만큼 질도 귀중히 챙긴다. 염부들은 가장 맛있다는 25~29% 염도의 천일염을 일구기 위해 늘 비중계(比重計)를 달고 산다. 날씨도 줄줄 왼다.

곰소염전에서 바닷물이 천일염으로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20일. 바닷물이 여러 증발지를 거쳐 소금이 맺히는 결정지로 오기까지가 15일이고, 결정지에서도 3~5일을 지나야 진짜 소금꽃이 핀다. 하나 비를 맞으면 이 모든 과정이 허사가 된다. 염부가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가 꽤 최첨단이야. 기상청 예보로도 부족해서 오래전부터 위성방송으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방송의 기상 예보를 챙겨봤다니까.”

5월 중순 약 열흘간, 변산에서 송홧가루가 날려오면 투명하던 염전은 누렇게 물든다. 『동의보감』에도 그 효능이 전해지고,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다는 귀한 송홧가루 소금이 여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안의 봄도, 곰소염전의 천일염도 산과 바다에서 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비 소식에 비상이 걸려 염부들의 채렴작업은 오후 5시부터 해질녘까지 또 한 차례 이어졌다. 그 분주한 움직임이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신비롭게 비쳤다. 알알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소금꽃 더미는 여느 꽃 못지 않게 화려했다. 낙조가 들자 변산 아래로 바닷물 자작한 소금밭과 낡은 소금창고까지 곱디고운 붉은빛이 돌았다.

고창의 봄은 싱그러운 연두

부안 아랫동네인 전북 고창. 고창의 봄은 땅 위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부안의 봄빛이 염전에 피어난 천일염의 투명한 색이었다면, 고창의 봄빛은 붉은 황토를 비집고 일어난 싱그러운 푸른색이었다. 바로 청보리 덕분이다.

하나만 떼놓고 보면 별 볼일 없어도, 한 군데 뭉쳐 있으면 꽤 그럴듯한 풍경이 되는 것이 있다.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의 청보리가 바로 그렇다. 학원농장 청보리밭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관농업 현장이다.

4월 중순의 청보리는 아직 이삭이 패기 전이라 오로지 연둣빛으로 드넓은 언덕을 뒤덮고 있었다. 학원농장 보리밭의 규모는 약 50만㎡(15만 평). 주변 농가까지 합치면 약 100만㎡(30만 평)에 달하는 들판이 모두 푸른 융단의 모습이었다.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봄의 풍요로움을 안겨주기에도 충분했다.

이 청보리밭에서 열리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올해로 11회째가 된다. 학원농장 주인이자 축제위원장인 진영호(66)씨가 선친 고(故) 진의종 전 국무총리에 이어 이곳에서 보리 농사를 한 지 어언 22년. 학원농장 청보리밭은 1990년 후반 사진작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며 봄 풍경을 찾아 떠도는 이들의 성지가 되었다. 축제를 연 뒤로 관광객이 더욱 늘어 지금은 매년 수십만 명이 몰려들고 있다. 이 아름다운 경관을 무대로 빌린 영화도 꽤 된다. 멀게는 ‘웰컴 투 동막골’, 가깝게는 ‘늑대소년’이 보리밭에서 영화로운 순간을 연출했다.

청보리밭은 눈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그림의 떡이 아니었다. 보리밭 사이사이로 폭 2m 남짓한 흙길이 나 있어 마음껏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걸어보기로 했다. 한창때는 어른 허벅지만큼 키가 크는 보리지만 아직 때가 일러 무릎 언저리에 잎이 닿았다.

“보리도 품종 개발이 진행돼 이제는 다 커도 허리춤을 넘지 않아요. 곡식은 덩치가 크면 영양소를 이리저리 뺏겨 열매가 튼실하게 여물지 못하니 작을수록 유리하거든요. 보리밭에서 쭈그리고 앉아 몰래 연애를 즐기는 건 이제 옛말이죠. 지금은 아예 드러눕지 않으면 들키기 십상이니. 하하. 보리 키가 더 작아지기 전에 어서 놀러와 보리밭을 걸어봐야 할 텐데.”

청보리밭 언덕에서는 제법 바람이 불었다. 포근한 흙길을 따라 보리밭 한가운데로 들어서니 몸의 모든 감각이 열리는 듯했다. 언덕에 자리 잡은 전망대에서 내다보니 너른 보리 평원은 ‘S’자로 고불고불 뻗은 흙길 덕분에 더욱 아름다웠다.

고창의 봄 색깔로 동백의 붉은빛도 빠질 수 없다. 동백꽃 하면 단연 선운사다. 미당 서정주가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선운사 동구’)라며 아쉬워 했고, 시인 김용택도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선운사 동백꽃’)라고 노래했다.

선운사 대웅전 뒤편으로 동백꽃이 만발했다. 가까운 나무만 보면 몇 그루 안 되는 것 같지만, 선운사 동백나무는 3000그루가 넘는다. 수령 500년이 넘는 것도 수두룩하다. 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돼 울타리가 쳐 있어 동백나무숲으로 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하나 울타리 너머로 나무가 드리워져 있어 꽃 구경을 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선운사는 가장 늦게 동백꽃이 피는 곳 중 하나다. 남도보다 한 달 이상 늦은 3월 하순께 꽃망울을 맺어 4월에 들어서야 피어나기 시작한다. 내륙의 봄이 절반 정도 지나갈 무렵, 선운사 동백은 땅으로 떨어진다. 올해 선운사 동백은 4월 하순에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울타리 너머로 동백꽃이 모조리 떨어지면 우리도 서서히 봄을 배웅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행 정보

부안 곰소염전까지는 서울시청 기준으로 자동차로 3시간30분 남짓 걸린다. 곰소염전에서 고창 청보리밭까지는 1시간 거리다. 곰소염전 해설 프로그램을 예약하면 경력 30년 이상의 베테랑 염부가 무료로 천일염의 요모조모를 설명해 준다. 곰소염전 063-582-7511. 다음달 3~5일에는 부안 마실축제가 열린다. 곰소 천일염 체험을 비롯해 각종 문화행사가 열린다. 부안 마실축제 제전위원회 063-580-3931. 고창 청보리밭축제는 19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이어진다. 보리 식품 체험, 전통놀이, 민속 공연 등이 벌어진다. 보리와 보리새싹으로 맛을 낸 보리밥(7000원)이 별미다. 3㎞ 보리밭 샛길을 둘러보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위원회 063-562-9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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