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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의 와인야담 <12> 내 기억 속 최고의 맛
셀러 마스터가 고개를 흔들었다.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하는 짓이란….” 이런 기분 나쁜 상황에서도 마스터는 나를 오래된 콩티 셀러로 안내했다. 13세기 수도원의 지하에 있어 입구가 꼭 피난처 같지만 일단 계단을 내려가면 조용하고 아늑하면서 정갈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 속에 DRC가 만드는 6개의 그랑 크뤼 오크통들이 놓여 있었다.
“오크통 몇 개만 골라 시음시켜 줄까 아니면 모두 할까?”라는 질문에 나는 “저 시간 많아요”라고 했다. 그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고 하나씩 천천히 시음시켜 주었고, 드디어 콩티 바로 전 라 타슈(La Tache)까지 맛보았다.
여기까지 시음한 것만도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사실 내게 큰 감회는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네 콩티를 시음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 향기부터 달랐다. 혀를 휘감는 맛이 이전에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최고의 맛이었다. 나는 3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들꽃이 만발한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었다. 얼마 전 아기를 낳아 고통이 무엇이고 희열이 무엇인지 느껴본 여인. 이제 바람 앞에서 끝없는 자유를 느낀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부드럽게 포옹을 하며 절대적 충만감을 느낀다. 느낌이 바로 그랬다.
얼마 전 특별한 모임에서 로마네 콩티를 마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10년 전 서로 사인한 와인 병을 오픈하는 자리였다.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95년산이었는데 처음에는 약간 닫혀 있었으나 잠시 후 그 특유의 다양한 향기를 뿜어냈다. 산미가 많이 느껴졌지만 뒤쪽으로 타닌도 살아 있어 더 오랫동안 숙성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시기에 최상의 적기는 아니었지만 향은 그 어느 와인보다 품위가 느껴져 빠져들게 만들었다.
한 병을 오픈했을 뿐인데 방안은 이미 콩티 향기로 가득했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린 분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잊었으리라. 한잔을 음미하는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가득했고 감동으로 행복한 모습이 역력했다. 한 병의 술이 많은 사람에게 이 같은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명품 와인의 힘 아닐까.
세월이 많이 흘러도 오늘 참석한 분들은 자주 또는 가끔 이 순간의 기억을 되뇔 것이다. 나는 처음 마신 콩티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느꼈었는데 이분들은 누구를 느끼셨을지 궁금하다. 설마 집에 계신 마나님을 느끼신 것은 아닐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