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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532> 우리 종이, 한지

권철암 기자
“고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품성이 달빛과 너무 닮았어요.”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의 마지막 장면. 주연급 배역을 맡은 예지원은 한지(韓紙)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지는 어떻게 만들어 어디에 활용하고 있는지, 또 세계 속의 한지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등을 알아봤습니다.



스스로 숨쉬며 공기 정화 … 끈질긴 생명력으로 천년 가는 종이

한지는 말 그대로 우리 민족 고유의 종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라 불릴 만큼 우리 생활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근대에 들어 외국산 종이 유입으로 쇠퇴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20여 년 전부터 “우리 한지를 생활 속에서 살리자”는 움직임과 함께 부활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지의 역사



액세서리


친환경 소재인 한지는 웰빙 열풍과 함께 관심을 받으며 각종 제품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그 종류는 흔히 알려져 있는 창호지부터 시작해 침구류까지 다양하다. 한지를 이용한 전등은 은은한 불
빛이 매력적이다.
 한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4세기쯤으로 추정된다. 당시 불교와 함께 제지술이 전해지면서 종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선조들은 외국의 제지술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층 더 발전시킨 생산 기술을 보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기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에 종이 생산기술을 전해줬다”는 문헌 등이 이를 증명한다.



 11세기 고려가 불경을 펴내면서 한지 생산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국가에서도 종이 생산 기술자들에게 ‘지장(紙匠)’이란 명칭을 주고, 종이를 만드는 동시에 새 기술을 개발토록 했다. 조선시대 종이 생산 기술은 국가가 관리했다. 1415년 최초의 국가 운영 종이 생산시설인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는 등 생산 기술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또 인접한 중국·일본의 종이 생산 재료와 기술을 들여와 우리의 기술을 한층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한지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고 생활환경이 한옥에서 양옥으로 바뀌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집집마다 붙여져 있던 문풍지 자리를 유리가 대신하고 붓글씨는 향교 같은 곳에서나 쓰는 것으로 변해 한지는 설 자리를 잃었다.



한지 제조 과정



옻칠 쟁반 등도 스스로 숨을 쉬는 특성을 제품화한 대표적 사례다.


 “한지는 스스로 숨을 쉰다”고 표현한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미세한 섬유의 기능 때문에 생긴 말이다. 한지 섬유는 습기·나쁜 냄새 같은 것을 빨아들이고 정화된 공기를 내뿜는 역할을 한다. 이런 한지를 만들어내는 데는 10단계 과정이 필요하다.



 한지는 원료가 닥나무여서 ‘닥종이’라고도 한다. 원료인 닥을 구하는 것은 한지 만들기의 시작이다. 매년 12월부터 다음해 초봄까지 1년생 닥나무 가지를 베어 1~2일 불린 후 가마솥에 넣고 3~4시간 찐다. 삶은 닥은 흐르는 물에 씻어 껍질의 잡티를 제거한다. 티를 골라낸 원료는 평평한 곳에 올려놓고 1~2시간 두들기면 하얀 섬유질 형태로 변한다. 이를 물이 담긴 종이 만드는 통에 끈적한 풀(황촉규)과 함께 넣는다. 다음엔 장인이 섬유를 엉겨붙게 하기 위해 발을 앞뒤로 흔들어 한 장의 한지를 뜬다. 이를 건조시켜 다듬이질 하면 매끄러운 한지 제조가 완성된다.



한지의 특성



차종순 예원예술대학교 한지학과 교수가 한지 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오종찬]


 한지는 매우 질기다.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를 빨아들인다. 바꿔 말해 보온성과 통풍성이 뛰어나다는 것인데, 한지를 문풍지로 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양식 종이는 바람이 통하지 않고 습기는 조금 빨아들이지만 다시 말리면 찢어진다.



 한지의 또 다른 특성은 보존성이다. 1000년이 넘도록 변색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966년 불국사 석가탑 안에서 발견됐는데 글자 먹색이 선명하게 보존됐다. 종이의 제작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704~751년으로 밝혀졌다. 1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썩지 않고 보존됐다는 얘기다. 이는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사용하고 한지 자체가 숨을 쉬는 특성이 만들어낸 결과다. 100년 이내에 누렇게 변하는 황화 현상으로 삭아버리는 양지와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한지의 본고장, 전주



 전북 전주, 경북 안동, 강원도 원주는 우리나라 3대 한지 생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이들 지역은 그 명성에 걸맞게 한지를 주제로 한 축제부터 테마파크, 상품 개발, 세계화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은 그중에서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 촬영지로 전주를 택했다.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국영 한지 공장인 조지서 가운데 전라도 전주지소의 장인이 총 23명으로 전국 단일 군현 중 가장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전주 지역에서 만들어낸 한지의 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는 “전라도, 그중에서도 전주의 종이 품질이 좋다”는 부분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도 “전주에서 생산된 종이 풀질이 다른 지역보다 상품(上品)”이란 대목이 있다.



 평양상공회의소가 1944년 발간한 ‘조선지’에는 당시 한지 제조업 종사 가구수를 조사한 통계가 나오다. 그해 전국적으로 4310호가 종이 만드는 일을 했는데 이 중 전북이 1772호로 가장 많고 그중에서도 전주(완주)가 475호로 월등했다.



 차종순 예원예술대 한지학과 교수는 “전주(완주)는 질 좋은 닥나무가 많이 생산되고 물이 좋아 종이를 만드는 우수한 장인이 모여 자연스럽게 한지로 유명한 곳이 됐다”고 설명했다.



 한지는 근대 문물이 들어오며 쇠퇴했다. 10여 년 전부터 전주시와 완주군(조선시대는 모두 전주군에 포함)은 한지 부흥에 시동을 걸었다. 대표적인 것이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대승한지마을 프로젝트다. 40년 전만 해도 수백 명의 지장과 초지공이 모여 살던 곳. 하지만 명맥만 간신히 유지할 정도가 됐다가 지금은 한지 생산부터 체험·숙박·상품 전시·판매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마을로 탈바꿈했다.



한지의 산업화와 세계화



 한지는 최근 웰빙 열풍을 타고 대중의 관심을 새롭게 받고 있다. ‘친환경적 소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서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지의 산업화는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제조업체들은 한지를 이용한 친환경적인 벽지와 각종 인테리어용품 등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한지로 만든 상품은 앞치마·식탁보 등 지극히 일상적인 것부터 시작해 가구·옻칠장판까지 다양하다. 한지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은은한 매력을 발산하는 조명기구도 있다. 자체 공기 정화 기능과 가볍다는 장점을 활용한 한지벽지·침구류 등은 웰빙 열풍을 타고 날로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또 넥타이·속옷·스카프 등 의류와 시계·목걸이·팔찌·지갑 등 다양한 분야에까지 한지는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우수성에 비해 세계화는 걸음마 수준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제지술을 전해 받은 일본이 세계 종이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일본의 화지(和紙)는 우리와 같은 닥나무를 이용해 만드는데 품질이 한지 못지않을뿐더러 전통적인 면도 그대로 이어가 ‘종이=일본’이란 공식을 만들어냈다. 문구류·포장지·공예용품에 이르기까지 화지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산업화를 이룩해 놓고 있다.



 우리 한지는 겨우 20여 년 전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해 공예품과 일반 생활용품에도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업체가 가내수공업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영세성을 면치 못해 발전 속도가 더딘 것이 사실이다. 몇몇 업체는 기계화를 통해 일부 제품을 수출하고 있지만 일본 화지 제조업체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우리 한지를 산업화하고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전통 방식을 살리면서도 대중화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완주대승한지마을 윤희숙 기획실장은 “우리 한지도 ‘루이비통’ ‘샤넬’ ‘프라다’ 같은 명품 대열에 들어가려면 한지의 특성과 전통을 최대한 살린 브랜드 파워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권철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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