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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우면 복이 와요~ 애써 만든 인형에 불 불 불

비르헨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성모마리아상(사진 왼쪽)이 꽃으로 단장돼 있다.
스페인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의 나라다. 일 년 내내 거의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곳곳의 축제 때문이다. 정열적이고 감각적인 스페인은 ‘꽃보다 할배’나 ‘꽃보다 누나’에겐 좀 부담스러운 여행지인지도 모른다. 7월 팜플로나에서 벌어지는 소몰이 축제(San Fermin)나 8월 발렌시아 부뇰에서 벌어지는 토마토 축제(La Tomatina)의 집단적 광란 현장을 감내할 수 있다면 모를까.

스페인 발렌시아 ‘라 파야스’ 축제를 가다

그러나 매년 3월 15일부터 19일까지 발렌시아(Valencia)에서 열리는 인형 태우기 축제(La Fallas·라 파야스)는 할배나 누나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지는 폭죽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고,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시끄럽긴 해도.

발렌시아는 스페인에서 셋째로 큰 도시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좀 외면받는 곳이다. 관광객 대부분 수도인 마드리드와 인근 톨레도, 바르셀로나나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와 그라나다에 몰려서다.

그러나 발렌시아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엘 시드(El Cid) 장군의 도시이며,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 파에야의 본고장이다. 또 각국에 열성 팬을 거느리고 있는 도자기 야드로(Lladró) 피겨린 본사가 있는 곳이다. 스페인 수출 품목 1, 2위를 다투는 타일의 대형 생산기지이기도 하다. 발렌시아가 스페인 도자(陶瓷) 산업의 중심이 된 것은 711년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을 때 이곳에서 타일과 도자기 제조의 터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발렌시아는 이렇게 역사문화적으로 유명 관광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3월 축제 기간에 맞춘 발렌시아 방문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동화 속 마법의 성에 온 느낌이 드니 말이다

사람 크기에서 빌딩 높이까지
파야(falla)는 대형 인형 혹은 불꽃을 뜻한다. 축제 기간 동안 거리 곳곳에 수백 개의 파야가 세워지는데 5, 6층 빌딩 높이의 대형 파야부터 어른 키만 한 파야까지 천차만별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꼬마용 파야’도 있다. 올해 시 전역의 주요 위치에 놓인 대형 파야는 총 12개였다.

등장 인물도 정치인, 예술가, 학자, 할리우드 스타나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가리지 않는다. 예년의 경우 현실 정치에 대한 풍자도 강하고, 환경오염이나 저출산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 다수 등장했다. 그러나 올해는 웬일인지 그런 사회적 경향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엔터테인먼트적 트렌드가 두드러졌다. 심각하기보다 가볍게 즐기는 대중 소비문화의 글로벌적 확산이 이 축제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

대형 파야는 상업광고 목적으로 유명 회사들이 후원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 커뮤니티가 순수하게 사비를 털어 만드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제작을 위해 일 년 내내 엄청난 공을 들인다.

2월 말 제작이 완료되면 축제 주최 쪽에서 심사를 거쳐 설치할 장소를 결정한다. 설치가 마무리되는 3월 14일이면 파야가 놓이는 장소마다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각 커뮤니티들은 거리에서 축하잔치를 벌인다. 사내아이들은 조그만 폭죽이 수백 개씩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다니면서 여기저기서 폭죽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다. 맥주와 와인, 각종 파타스가 제공되고 수십 명이 먹을 파에야를 만드는 대형 솥이 불 위에 올려진다. 천막을 친 간이 댄스홀이 들어서거나, 밴드의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행사기간은 15일부터 19일까지라고 하지만, 3월 1일부터 ‘마스칼레타(Mascaleta)’라고 부르는 폭죽 터뜨리기 행사가 시작되므로 사실 3월 내내 떠들썩하다.

전시물을 보러 멀리 가지 않아도 되고, 특정 장소 안에 가두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 축제의 미덕이다. 평소 다니던 길에 전시물이 설치돼 있기에 그만큼 친숙하다. 생활과 축제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곧 잔치다. 일상의 축제요, 축제의 일상화인 것이다.

발렌시아 시민들은 이 축제를 통해 그들 커뮤니티의 결속력을 다지고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이런 그들의 노력이 몹시 부러웠다. 파야를 만들고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지역 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해나가는 모습에서 현대성의 위력으로도 붕괴되지 않고 있는 공동체의 안정성이 읽혔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파야는 그런 자부심의 표현이리라.

이들 파야가 전시되는 기간은 딱 5일뿐이다. 19일 자정을 기해 이들은 모두 불에 태우는 행사, 크레마(Crema)를 통해 한 줌 재로 남는다.

일 년 동안 갖은 정성을 들인 파야를 태워 없애는 것은 그리스도 아버지인 요셉이 목수였기 때문에 성 요셉의 날인 3월 19일에 목수들이 이를 기념해 그들의 작품을 불에 태우고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지난해의 액운을 태우고 새해의 좋은 운을 비는 것은 세계 공통의 습속인 듯하다. 이들의 크레마는 우리나라 정월 대보름의 달집태우기와 꼭 닮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손에 쥔 것을 놓아야 새것을 쥘 수 있는 것처럼, 파야는 소멸을 통해 소생한다. 올해 사라지지만 내년에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윤회를 거듭하는 불교의 섭리와도 닿아 있다.

성모 마리아는 어느새 꽃으로 옷을 입고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벌어지는 ‘성모 마리아상 헌화 퍼레이드(Ofrenenda a la Virgen de los Desamparados)’다. 비르헨(성모 마리아)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성모 마리아상에 꽃을 바치기 위한 행렬이다.

이 퍼레이드가 눈길을 끄는 것은 파예로(Fallero)라 불리는 퍼레이드 참여자가 모두 화려하기 그지없는 발렌시아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행렬에 나서기 때문이다. 마치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풍경이 재현된 듯한 느낌이다.

여성 드레스는 대부분 화려한 금실은실 자수에 레이스 장식을 곁들였다. 머리 장식도 대단히 화려하다. 양쪽 귀 옆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귀마개 모양으로 만들어 핀을 꽂고, 뒷머리는 묶거나 땋아 올려 정수리에 큰 장식 빗인 페이네타(Peineta)를 꽂았다. 레이스로 장식한 베일인 만티야(Mantilla)를 늘어뜨리기도 한다. 특히 전통 의상을 입고 떼 지어 가는 꼬마들의 모습은 너무나 귀엽고 앙증맞아서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이런 복장이니 저마다 왕비 아니면 귀부인, 공주님들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렌즈를 즐긴다. 아이들이나 소녀들도 수줍어하기보다는 맹랑한 얼굴로 뻐기고 있다. ‘예쁜 건 알아가지고…’ 하는 표정들이다.

퍼레이드는 북 역에서 시작해 비르헨 광장까지 이어진다. 이 때문에 도시 중심부 모든 도로가 통제된다. 행렬에 참가하는 파예로들은 커뮤니티별로 이동한다. 각 커뮤니티에는 기수와 브라스밴드가 따로 있어 행렬을 인도한다. 기수가 맨 앞에 서고 그 다음에 꼬마들, 숙녀들, 어른들 순서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이 퍼레이드는 밤 9시가 넘도록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좀처럼 지친 표정은 볼 수 없다.

일단 비르헨 광장에서 행렬을 멈추게 되면 많은 여성은 눈물을 흘린다. 외지인인 나는 그 눈물의 의미가 궁금했다. 아마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사히 행사를 마친 안도감, 올 한 해도 가정의 평화를 빌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행복감 등등.

혹 엄청난 금전적 출혈에 대한 압박감은 없을까. 여성 드레스의 경우 평균 2000만원 선이라고 하니, 일반 서민들로서는 퍼레이드 한 번 참여에 들이는 비용치고는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 구성원들 대부분이 참여한다고 하니 빠지기도 어려웠을 테고.

비르헨 광장의 성모 마리아는 처음에는 나무 골조만 있는 앙상한 모습이지만, 꽃으로 된 옷을 입기 시작한다. 완전히 꽃단장을 한 모습은 19일 아침 공개되는데, 이 모습을 일찍 보기 위해 광장 주변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도 많다. 꽃단장 성모 마리아상은 행사가 끝나도 보름 동안 더 진열된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나는 속으로 빌었다. 다음 번에도 건강하게 이 축제를 보러 다시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광장에 모인 대다수 사람의 소망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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