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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에서 쏟아지는 바다의 선율과 풍경

2500석이 넘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넓다. 공연 전 덩그러니 놓인 한 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객석은 달랐다. 모든 좌석이 일찌감치 예매에 성공한 청중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남은 빈자리는 오직 하나, 피아노 앞의 의자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달 30일 열린 예술의전당 예프게니 키신 피아노 리사이틀

시작부터 쏟아진 뜨거운 함성을 맞으며 등장한 예프게니 키신이 그 마지막 자리를 채우며 연주를 시작했다. 3월 30일 밤은 5년 만에 이루어진 키신의 세 번째 내한, 그 기다림의 가뭄이 조용히 대지를 적시는 비처럼 해갈되는 시간이었다. 전달과 수용이 강도 높은 집중력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번 리사이틀의 프로그램 가운데 해석의 향방이 가장 궁금했던 곡은 첫 곡인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850이었다. 선배인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 비해 느슨하고 긴 구조에 불완전함을 지녀 전체적인 구성을 파악하기에 녹록지 않은 작품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손 가는 대로 쓴 곡에 가깝다. 피아니스트가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힘든 이 작품에서 키신은 한 음도 남김없이 청중의 눈과 귀를 붙들어 맸다.

1악장에서 키신은 처지지 않은 기운으로 흩어진 곡상을 그러모아 나아갔다. 왼손의 중저역이 짙었고, 고음역은 밝게 빛났다. 점차 페달을 많이 쓰며 음의 덩어리를 크게 만들자 마치 커다란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고음에서 약동하는 음은 거대한 유기체가 눈을 깜박이는 듯 생동감을 부여했다.

2악장은 기어 변속이 아니라 아예 다른 차로 갈아탄 느낌이었다. 가빴던 호흡을 충분히 진정시키고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배경 속으로 듣는 이를 이동시켰다. 키신의 진가는 이런 곳에서 발휘된다.

3악장에서 키신은 특유의 두텁고 내밀한 중저음과 투명한 고음을 어우러지게 연주했다. 절도가 있었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눈덩이를 굴리듯 음량이 커지면서 점층적인 전개를 이루어냈다. 마지막 4악장. 시계를 연상시키는 행진곡풍 리듬이 수채화풍이었다면 묵직하게 전개되는 중간부는 거친 질감의 유화 같았다. 명암의 대비가 뚜렷했고 지축을 울리는 굵고 큰 중저음이 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엔딩 부분을 정중하고 부드럽게 가져간 것도 인상적이었다.

2부에서 연주된 스크랴빈의 작품들은 그동안 음반과 영상물을 통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입체적인 음향과 반짝이는 빛을 중시하는 스크랴빈의 성향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 중 하나가 키신이기 때문이다. 스크랴빈은 소나타 2번 1악장에서 고요한 남쪽 해변의 밤을 묘사했다. 키신의 연주는 마치 남국의 해변에서 얼굴에 부는 바람을 맞으며 간헐적으로 치는 파도를 지켜보는 듯한 체험이었다. 2악장에서는 강렬하고 작게 부서지는 격동과 소란을 보여줬는데, 전체적으로 스크랴빈 특유의 어둠과 빛, 물과 불의 대비가 그의 건반을 통해 표현됐다.

이어진 12개의 연습곡 Op.8 중 2, 4, 5, 8, 9, 11, 12번에서도 키신은 ‘바다를 닮은 음향’을 선보였다. 푸른색에서 회색에 이르기까지의 색채의 스펙트럼과 해변과 먼바다 사이의 깊이의 낙차, 모래사장에 와서 부서지는 파도와 포말의 입자에 이르기까지, 그는 건반에서 바다의 풍경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태양빛에 반사되는 은빛 물고기처럼 반짝이는 고음들과 잠영하는 고래와 같은 크고 어두운 저음이 그의 열 손가락과 두 발에서부터 2500여 청중에게 전달됐다. 장엄함과 질풍노도가 공존하는 유명한 연습곡 12번을 치고 그가 일어서자 콘서트홀에는 록 콘서트 같은 함성이 메아리쳤다.

키신은 커튼콜에 90도 가까운 인사로 답하며 바흐 ‘시칠리아노’, 스크랴빈 에튀드 Op.42-5, 쇼팽 ‘영웅’ 폴로네즈 등 세 곡을 앙코르로 들려주었다. 앙코르 전 소매를 점검하던 키신은 본 프로그램을 모두 마쳐 홀가분한 듯 간간이 미스터치도 섞인, 마음껏 약동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2006년과 2009년 모두 10곡의 앙코르를 들려주었던 키신이기에, 1부와 2부 못지않은 ‘3부’로서의 앙코르를 기대한 청중들에게 세 곡은 포만감을 느끼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의전당을 나서자 슈베르트 소나타의 길고도 파란만장한 여정과 포연 속 섬광 같았던 스크랴빈 작품들의 감동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로등에 비친 벚꽃이 빛을 내는 봄밤의 거리를 걸으며 넓은 홀 곳곳에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키신과 피아노 사이의 인력(引力), 그 수수께끼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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